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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실 | 존 스트루드위크(John Melhuish Strudwick, 1849-1935)

2012. 10. 9.

 

 

 

황금 실, A Golden Thread


존 스트루드위크

John Melhuish Strudwick, 1849-1935

 

 

 

관련 링크

네이버지식백과   http://bit.ly/T08DE1

Works of Art       http://bit.ly/T08wsi

Wikipedia           http://bit.ly/T08iBp

 

 

땅 위에 발을 디디고 있는 인간들은 저 멀리 우주 창공에 인공위성이 띄워 올려놓고도, 미래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 때문에 신비주의에 쉽게 빠져든다.
"과장님! 전화받아보세요?"
엉겁결에 건네받은 전화수화기 너머로 그리 격하지 않은 경상도 사투리가 들려온다.
"여보세요! 말 해보이소?"
"저, 보살님!"
"곧 비행기 타겠네예?"
저편의 목소리는 너무 거부감 들지 않게 또박또박 미래의 단편들을 뱉어내고 있었다.
"네? 그럴 일 없는데요."
"곧 타겠네예. 기다려 보이소."
이건 아니다 싶었다. 요즘 같이 바쁠 때, 팔자 좋게 휴가를 갈 일도 없고 업무의 성격상 출장을 갈 일도 없다.
"요즘 몸이 좋지 않지예?"
건강에 자신하고 있었지만, 정기건강진단 결과 재검을 요구하고 있어 집에서도 걱정하고 있었다.
"예,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최근에 화분 하나 죽어나간 거 있지예?"
그제 버린 화분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게 좋지 않네예. 지금도 하나 죽어가고 있네예. 그걸 살려야 합니더. 허투루 듣지 말고 꼭 그걸 살리소. 알겠지예."
이 과장은 조금 구미가 당기듯 조급하게 물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그 가지에 황금 실을 묶어 두이소. 그러면 괜찮을 깁니더. "
그리고 목소리는 미래에 대한 예언 한마디도 잊지 않았다.
"혼자서 뭘 하는 걸 좋아하네예. 공부하면 잘 될 겁니더."
통화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이러한 통화는 요즘 부서 전체의 화젯거리였다.
누구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선가 용하다는 보살의 전화번호가 흘러들어왔다. 동자승의 내림을 받았다는 그 보살은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에 그리 거부감 들지 않게 미래를 이야기해주고도 복채를 받지 않았다. 미래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싶어 하는 부서 사람들이 호기심 반 기대감 반으로 앞다투어 전화해댔다. 밑져 봐야 본전이었다.
가톨릭 신자여서 종교를 방패 삼아 호기심을 자제하고 있었는데, 짓궂은 동료의 장난으로 엉겁결에 긴 통화를 하게 된 것이다.
"과장님! 뭐래요?"
들은 그대로 얘길 해줬고 이는 곧 부서 전체로 퍼져 나갔다.
사람들은 서로서로 보살이 말해준 미래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해대며 한낱 장난으로 치부하려 하지만, 한번 내뱉어진 말은 그 진실 여부를 떠나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생각만큼 쉽게 무시할 수도 없게 된다.
"글쎄, 난 공부하느라고 늦은 나이 되도록 장가도 안가고 있는 형이 걱정돼서 물었는데, 보살이 형이 외국으로 공부하러 간다는 거예요. 내가 그랬지. 형은 이제야 석사 받고 귀국해서 좋은 직장 잘 다니고 있는데 무슨 말이냐. 그건 말이 안 된다. 그런데 무조건 외국으로 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형한테 전화했더니, 형이 박사학위를 받으러 현지 학교에 서류를 보내고 통보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예요. 나보고 어떻게 알았느냐는 거예요. 사람 기절초풍하지 않겠어요."
"저도 그래요. 언니를 얘기했더니 결혼일자를 정확히 맞췄어요. 결혼 여부야 반반의 확률이니까 그럴 수 있다지만 결혼날짜는 좀 심하잖아요. 놀랄 수밖에요!"
나는 손가락에 낀 묵주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죽어가는 화분을 생각하고 있는데, 실장이 불러 앉힌다.
"이 과장, 내주쯤 우리 분야에 대한 안목을 넓힐 수 있는 해외출장 건 하나 잡아봐. 이제 가만히 앉아서 프로젝트를 하는 시대는 끝난 것 같아."
이건 첫 번째 징후였다. 그동안 아무런 기척도 없던 해외출장이 보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현실이 되다니. 아무리 점술을 미신으로 치부하더라도, 이쯤 되면 뜨끔해질 수밖에 없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베란다의 화분을 조사했다. 왼쪽 끝머리에 시들어가는 화분이 보였다. 이건 두 번째 징후였다.
"당신, 이 화분에 물 좀 줘. 집에 있으면서 뭐하는 거야."
"글쎄, 그게 왠지 시들시들하네요? 갖다 버릴까 봐요."
"무슨 얘기야, 살아 있는 생명을 살려볼 생각이 먼저지."
자신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왜 소리는 질러요?"
영문을 모르는 아내는 남편의 과민반응을 의아해했다.
저녁 식사를 하며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고스란히 아내에게 이야기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아내는 화난 목소리로 남편의 허황하고 믿기 어려운 경험을 조목조목 반박해나갔다.
"당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그런 장난을 해요. 잘 생각해봐요. 미래를 예언하기는 쉬워요. 미래에 대해 점쟁이에게 매달리는 사람들은 그 진실 여부에 대해서 원망하질 않아요. 안 그래요. 그 점쟁이가 당신의 미래를 틀리게 예언했다고 그 사람한테 가서 멱살이라도 잡을 것 같아요. 천만에요. 당신은 다 그런 거지 뭐. 그러고는 곧 잊어버릴 거예요."
아내는 말이 길어질수록 논리를 찾아갔다.
"출장 건도 그래요. 그건 당신이 그 예언의 실마리를 자신도 모르게 찾고 있기 때문이에요. 실장이 그 당장 불러서 해외출장 얘기를 꺼내서 그 점쟁이가 맞췄다는 거예요? 실장이 석 달쯤 후에 출장에 대해 얘기했다 해도 당신은 그 점쟁이를 떠올렸을 거예요. 그리고는 정말 용하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했을 거라고요."
보살의 말이 신기했듯이, 아내의 말도 신통했다.
"사람들은 숱하게 많은 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만, 예언을 들은 뒤 돌부리에 걸리면 예언의 실현으로 생각하죠. 그게 우리네라고요. 당신은 그 화분이 다 죽어가는 것처럼 보이겠죠. 만약 그게 없었다면 당신은 게 중 가장 허약해 보이는 걸 다 죽어간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결국, 우리 화분 중의 하나는 당신 눈에는 다 죽어가는 것처럼 보이게 되어 있어요. 알겠어요? 우리에게 있는 건 용한 점쟁이가 아니라 점쟁이 말대로 행동하는 우리가 있을 뿐이라고요."
아내의 말에 수긍했다. 논리적으로 아내의 말은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괜한 소동에 휘둘린 것 같아 아내 보기가 민망했다. 아내는 마지막 한마디로 남편의 종교적 외유를 치유코자 했다.
"내일 성당에 가서 고해성사 드려요."
"알았어."

다음날.
보살의 전화번호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파되었고 그 통화의 결과는 좋은 얘깃거리가 되었다. 나는 자신의 논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믿고 싶어 했고, 그런 의미에서 아내의 논리는 보살의 밑도 끝도 없는 예언보다는 믿음직스러웠다.
오후에 이 과장은 조퇴를 했다. 지난번 건강진단 재검진 결과를 듣기 위해 병원에 들러야 했기 때문이다. 결과는 수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큰 수술은 아니지만, 그동안 감기 한번 앓지 않은 건강체임을 자부했기에 조금 충격이었다. 아내에게 전화했다.
"그래, 뭐래요?"
아내의 걱정스러운 음성이 들린다.
"별거 아니래. 간단한 수술로 완치할 수 있대. 오늘 회사 조퇴하고 나왔으니까 성당 가서 고해성사하고 일찍 들어갈게. 정말 간단하다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내의 말대로 묵은 죄상을 낱낱이 고하고 오랜만에 집에 일찍 들어왔다. 얼굴 본 지 꽤 된 것 같은 아이가 폴짝 뛰어올라 가슴팍에 달라붙는다. 아이를 안고 베란다 창밖으로 단풍든 뒷산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울리지 않은 색상 하나가 언뜻 눈에 띈다.
어제 그 다 죽어가는 화분의 가지에 황금빛 부목을 대어져 있었다. 아내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애가 놀다가 가지를 부러뜨려서 ……."
이 과장 품에 안긴 아이는 속삭였다.
"아빠, 내가 안 그랬어. 정말이야."
내일 또 고해성사를 가야겠다. 강인한 아내를 연약하게 만든 자신의 병약함을 고백해야겠다. 또, 그건 황금 실이 아니라 빵 봉지 주둥이를 매는 금색 철사일 뿐이라고.
하느님도 이 정도는 속아주시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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