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덧칠하기/그림,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목걸이 | 해럴드 하비(Harold Harvey, 1874-1941)

2012. 10. 9.

 

 

 

가장 좋아하는 목걸이


The Favourite Necklace

 

해럴드 하비

Harold Harvey, 1874-1941 

 

  

 

관련 링크

네이버지식백과   http://bit.ly/QPI71C

Works of Art       http://www.haroldharvey.info/

Wikipedia           http://bit.ly/QPIBEV

 

 

그는 내게로 오고 있다.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내게 프러포즈할 것이다. 3년 연애 끝에 중요하게 할 말이라는 것이 달리 뭐가 있겠는가? 너무 노골적이긴 하다. 조금은 은밀하게 진행해도 좋으련만.
푸른색이 좋을까? 푸른색은 상쾌하지만 차갑다. 노란색은, 음 …… 그건 너무 나이 들어 보일 거다. 분홍색 원피스가 좋을까? 낭만적이긴 하지. 원피스를 자꾸 갈아입는다. 그를 기다리면서 저녁 식사 때 입을 옷을 고르고 있다. 옷 따위에 이렇게 망설인 적은 없었는데 오늘 유난히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시간만 허비하고 있다. 특별한 날에 대한 흥분 때문인지 가만히 있질 못한다.
그는 내가 뭘 입었는지도 모를 것이다. 언제부턴가 그는 나를 보지 않는다. 3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연애 시절의 권태기일지도 모른다. 이제 결혼만 남았다. 결혼은 분명 시작인데 결혼이 끝이라는 기분이 자꾸 든다. 불안하다. 그는 뭔지 모르게 달라지고 있다. 그렇다고 뭐가 달라졌느냐고 물으면 딱히 꼽을 건 없다. 그냥 기분이 그렇다고 하면 모두가 빨리 결혼을 하라고 한다. 결혼이 모든 것의 해결책인 것처럼.
옷을 고르는 것은 고민이 되었지만, 목걸이는 정해졌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목걸이다. 그가 내게 처음 선물한 진주 목걸이다. 진주는 내 탄생석이다.
연애기간이 길어지면 해마다 생일이며 만난 날이며 이런저런 기념일을 챙기게 되고 기념일마다 선물을 고른다. 선물은 항상 기쁘지만, 어느 순간 선물 고르는 것이 기쁘지 않을 때가 온다. 의무가 되어버린다. 사랑에 의무가 따르는 순간 사랑의 순수함은 사라진다. 의무란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것이니까.
첫 선물은 다르다. 오로지 내가 기뻐하는 것만 생각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생각하고 고른, 나를 사랑하는 마음만 담긴 선물이다. 이후 선물은 더 값비싸졌지만, 그 가치는 첫 선물에 비길 수 없다. 그가 나를 가장 많이 사랑했던 순간이고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다.
조금 슬퍼진다. 사랑은 시간이 가면서 더 깊어지고 더 단단해져야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내 사랑은 느슨해진다. 나는 그를 의심한다. 그는 내 의심에 답하지 않고 모른척하고, 나도 애써 알려고 하지 않는다. 알게 될 진실이 알고 싶은 진실이 아닐 수 있다. 그는 내게로 오고 있다. 그것만 중요하다.
화사한 옷에 마지막으로 그가 내게 준 첫 선물인 진주 목걸이를 했다. 모든 것은 준비되었다. 그가 준비한 반지를 상상하며 그를 기다린다. 전화가 울린다. 늦으려나?

사고가 있었다. 교통사고다. 그는 술을 마시고 운전했다. 병원으로 갔지만 늦었다.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그를 위해 준비한 화사한 원피스를 입고 그의 사랑을 기억하게 하는 진주 목걸이를 하고 그의 주검을 내려다보고 있다. 비현실적이다.
숨이 막힐 것 같은데 눈물이 나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를 잃었다. 이제 막 새롭게 시작하려던 참에 찾아온 비극이다. 눈물이 나야 한다. 정말 죽을 만큼 슬프다. 그런데 눈물은 나지 않고 한 가지 의문만 머릿속에서 계속 맴돈다.
그는 내게로 오면서 술을 마셨다. 내게 프러포즈를 하러 오면서 술을 마셨다. 3년이나 사귄 사랑하는 이에게 오는데 술기운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는 술을 마시고 운전했다. 그는 술을 마셨다.

 

경찰이 사고경위를 설명했지만 들리지 않는다. 귀에는 먹먹한  정적만이 윙윙거렸다. 현실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다. 경찰은 그의 휴대폰을 건넸다. 혹시 반지는 없었느냐고 물었다. 없었다고 한다. 대답은 간단했다.
그는 술을 마신 채 반지도 없이 내게로 오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을 떠났다. 살아 있더라도 그는 내 곁을 떠났을 것이다.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사람은 잃었지만, 사랑은 잃지 않았으니까. 계속 진주 목걸이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그의 가족들이 왔다. 한차례 슬픔이 지나자 장례절차를 의논한다. 모두 다른 세상일처럼 현실감이 없다. 나는 장례식에서 그의 연인으로서 역할을 다할 것이다. 검은 상복을 입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목걸이를 하고 사랑하는 이를 잃고 슬퍼하는 가여운 연인으로 자리할 것이다. 나는 끝까지 그의 연인이다.
그의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손에 들린 그의 휴대폰을 본다. 판도라의 상자다. 상자를 열면 진실이라는 재앙이 튀어나올 것이다. 진실과 대면하고 싶지 않다. 더구나 이미 알고 있는 진실을.
휴대폰 마지막 수신번호로 전화를 건다.
“저, …… 사고가 있었습니다. …… 그는 죽었습니다. …… 당신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