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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천사 | 오딜론 르동(Odilon Redon, 1840-1916)

2012. 10. 3.

 

 

 

 

운명의 천사


The angel of the destiny

 

오딜론 르동

Odilon Redon, 1840-1916   

 


 

 

 

 

 

관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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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마땅하다. 답답하네.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인간은 내게로 오기 위해 태어난다. 태어나면서부터 종착점은 정해졌다. 탄생과 더불어 죽음 또한 운명이다. 인간은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살아 있는 내내 주어진 삶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고자 발버둥질한다. 내게로 뻗은 올곧은 길을 곧장 오지 못한다. 돌아오는 것은 시간 낭비다. 하긴, 인간에겐 헛수고도 운명이다.
그는 태어났다. 내게로 오는 길은 곧은길이라 제 길만 들어서면 그의 평생을 볼 수 있다. 가장 빠른 길이기도 하다. 그는 그 곧은길이 내게로 이어진 길이라는 것을 모르지만, 그 길이 가장 편한 길임은 알고 있다. 그만큼 길은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인간의 수고를 덜기 위한 나의 배려다. 하지만, 대부분 인생의 배려를 무시하고 곁길로 새기 마련이다. 예의가 아니다.
그는 길을 가다가 수많은 선택의 순간을 만난다.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곁길을 스스로 개척하는 삶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무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간혹 길도 없는 곳에 길을 내는 사람조차 생겨난다. 내게로 이르는 길에는 수많은 곁길이 생겨나고 곁길에도 다시 곁길이 생겨난다. 하지만, 돌아 돌아오더라도 결국은 제 길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운명이란 그런 것이다. 돌아올 순 있지만 피해 갈 순 없다. 인간에겐 시간의 연장이 의미 있는 모양이지만, 내가 보기엔 괜한 객기다.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이, 마침내 도착했군. 이 강을 건너면 삶은 끝난다네. 빠른 길을 두고 멀리 돌아오느라고 힘들었겠어. 자네 얼굴에서 삶의 굴곡과 세월의 고단함이 느껴지는군. 쯧쯧. 인간의 안간힘은 언제나 안쓰럽고 답답하네. 그래 봤자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하긴, 인간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위해 불가능에 도전하는 부류지. 결론이 뻔해도 겪지 않고는 결코 믿지를 못해. 자넨 충분히 겪었을 테니 이젠 운명을 믿겠지. 마지막 여행은 이 배에 올라 편히 쉬게나. 자네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내가 강 저편으로 데려다 주겠네. 그게 내가 할 일이니.”

삶은 고단했다. 선택의 순간에는 망설였고, 선택의 결과는 두려웠다. 고등학교까지는 정해진 길을 걸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누구나 가는 길이었기에 함께 어울려 흘러가는 것이 편했다. 어른들은 그래야 한다고 말했고 그것이 바른길이라고 말했다. 가라고 하는 길, 그것도 바른 길을 굳이 거부할 이유도 없었다. 아이는 아직 미숙하고 곁눈질을 허락받지 못하며 금지된 것을 두려워한다. 마음 한 편에 호기심을 키우며 아무도 모르는 죄책감을 느낀다.
호기심이 죄책감을 넘어서면 첫 선택의 순간을 만난다. 대학진학이 그 순간이었다. 어른들은 전공을 선택하라지만, 내겐 진학 여부가 선택이었다. 그 시절 항상 듣는 말이 있다.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 무엇을 하더라도 대학을 나온 누군가가 되어야 한다. 꿈을 가지라고 하지만, 아무도 내 꿈을 묻지 않는다.
세계를 여행하고 싶었다. 세상은 넓다. 평생 아무것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선택만 하면 모든 것을 볼 기회가 생긴다. 여행하는 사람들이 직업란에 무엇을 적는지 알지 못한다. 어른들은 직업란에 적지 못하는 직업을 신뢰하지 않는다. 뜬구름이라고 단정한다. 우려와 걱정과 두려움을 안고 떠났다. 최초의 선택이다.
여행은 멋진 일이지만 아무것도 없이 떠난 여행은 고된 여행이었다. 갈 수 있는 만큼 가고, 머물 수 있는 만큼 머물렀다. 긴 여행에서는 머무름도 여행이다. 내 인생 최고의 목표는 행복이었다. 힘든 일도 있었고, 먹는 것이 부족할 때도 있었고, 추운 곳에서도 지냈다. 그래도 행복했다.
그래 봤자 결국 여기에 다다른 것 아니냐며 한껏 비꼬지만, 나는 네가 겪지 못한 행복한 삶을 살았다. 네게로 이어진 길을 곧장 왔다면 넌 내 평생을, 적령기에 해야 할 입학, 취직, 결혼, 가정, 죽음에 이르는 모든 단계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너는 내 삶을 모른다. 네 시야를 벗어나면서 너는 내 삶을 꿰뚫어볼 기회를 잃었다. 넌 벗어나지 못하는 투덜이일 뿐이다. 네 시야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비꼬지만 실은 동경하고 있는 거다. 네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무엇을 하는지, 네가 보지 못한 어떤 풍경이 펼쳐지는지 궁금해 미칠 것이다. 떠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는 대신 그들을 비꼬면서 이 강가에 묶여 있는 것이다. 그 못마땅한 표정을 강에 비춰보면 볼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짓는 표정이 누굴 향한 것인지. 불쌍한 운명의 천사여! 정작 운명에 묶여 끝을 단정하고 아무것도 못하는 것은 너지, 내가 아니다. 내가 보고 겪은 그 모든 것, 네가 상상하지도 못하는 것들을 네게 얘기해주지 않을 거다. 내 삶은 내 몫이고 투덜거리는 것은 네 몫이니까.
“젠장, 잘난 체 하기는 ……. 내려. 여기가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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