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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거울 |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 1898-1967)

2012. 10. 15.

 

 

 

잘못된 거울, The False Mirror


 

르네 마그리트, Rene Magritte, 1898-1967


 

 

관련 링크

공식사이트 http://www.magritte.be/?lang=en

위키백과    http://bit.ly/Q5fY7Z

wikipedia   http://bit.ly/Q5fM8J

 


무작정 떠나기.
텅 빈 주머니만으로도 두려움 없이 떠날 수 있었던 학창시절에도 시도해본 적 없는, 이 "무작정 떠나기"를 하려고 강릉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은 나경은 그런 자신이 통 실감이 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이 되면 괜한 감상에 빠지곤 한다. 자신이 설정해놓은 목표와 현재 처해 있는 현실과의 괴리가 연말이면 유난하게 사람을 심란하게 한다. 목표는 언제나 현실을 앞서 가게 마련이니까. 엘니뇨현상 때문인지 12월에 어울리지 않는 겨울비는 이런 감상을 부채질한다.
주말을 하루 앞둔 어느 비 오는 날.
홀가분한 점심을 마치고 식당을 나오다 우연히 거울을 보았다. 갈매기가 느릿느릿 산책하듯 날고 있는 평화로운 바닷가에 서 있는 한 여자가 나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거울 속의 여자가 바로 나경 자신임을 깨닫는 데까지 언뜻 웃음이 나올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경의 뒤에서는 호젓한 바다 풍경을 내보내고 있는 소리 죽은 텔레비전이 거울 속의 바다배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순간, 나경은 겨울 바다로 무작정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회사에는 주말 휴가를 내고 집에는 거짓말을 하고 주말 새벽에 집을 나섰다.
"집에 일이 있어서, 내일 휴가를 좀 ……."
"엄마! 오늘 친구들이랑 대전에 사는 친구 집들이 가기로 했어요. 내일 올게요."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일을 해보는 것. 거짓말과 무작정 떠나기.
일탈(逸脫)에 대한 기대감이 나경을 들뜨게 했다.
어두컴컴한 그 새벽에 고속버스터미널 대기실에서 우두커니 1시간이나 기다려서야 겨우 강릉행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안의 따뜻한 기운이 자꾸 나경의 눈꺼풀을 내려놓는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강릉 10km"라는 표지판이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날이 밝았다.
버스를 내린 사람들은 모두 삼삼오오 짝을 지어 그들의 명확한 목적지를 향해 뿔뿔이 흩어졌다. 나경은 버스에서 내려서도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왜 자신이 지금 여기 있는지 출발 지점부터 다시 생각해야 할 지경이었다.
`‘아, 바다. 그래 바다를 보러 왔지!’
다시 정신을 차려 사방을 둘러보니 여자 홀로 서성이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호기심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아니 지나친 자격지심인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나경은 얼른 택시를 잡아탔다.
"안녕하세요! 어디로 가십니까?"
참으로 친절한 택시기사였다. 나경은 잠시 머뭇거렸다.
"저, 그냥 바다로 가주세요!"
택시기사는 고개를 돌려 나경을 이상하게 흘낏 바라본다. 택시기사도 그냥 바다로 가려는 나경을 이상하게 생각했겠지만, 나경도 갑자기 택시기사가 택시 강도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에 가까운 의심을 품었다. 창밖의 낯선 풍경도 그런 의심을 거들고 있었다.
"거기 친구 집이 있거든요."
그녀는 지금 그냥 바다에 친구 집이 있다고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스스로 제법 똑똑하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어느덧 겁먹은 바보가 되어 있었다. 어쨌든 택시기사는 강도로 변하지 않았고 경포대 어디쯤 그냥 바다에 나경을 내려놓았다.
겨울 바다는 호젓했다. 헛된 낭만을 쫓는 현실감을 잃은 겨울 연인들 한두 쌍이 그 넓은 모래사장의 여백을 메우고 있었다. 택시 강도 강박증에서 벗어나 탁 트인 겨울 바다와 마주한 나경은 아직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었다.
모래를 휩쓸고 나가는 거친 파도, 하늘 맞닿아 있는 수평선, 그즈음에 떠있는 바닷새. 겨울 바다는 거울 속의 여자가 있던 그 바다와 다르지 않았다.
나경은 어정쩡하게 모래사장 위에 자리를 잡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이 나질 않는다. 뭔가를 정리하고 정돈해야 할 복잡한 것들이 가득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텅 비어 있었다. 바다가 그렇게 한 것일까? 원래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일까?
파도에 실려온 낯선 목소리에 나경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저, 서울서 오셨습니까?"
목소리의 주인공은 양복 말쑥하게 입은 남자로 나경만큼이나 이 바다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네, 저, 그게 ……."
"혼자 오신 모양이죠?"
"아뇨! 친구 집이 여기 있어요."
"저 나쁜 사람 아닙니다. 그냥 서울에서 바다를 보러 무작정 차로 달려왔는데 ……. 혹시 오늘 서울 가실 거면 함께 가면 어떨까 해서요?"
"아니에요. 전 친구 집에서 자고 내일 갈 거예요."
때마침 연인 한 쌍이 자신들의 추억 만들기에 도움을 청했다.
"저, 사진 한 장 찍어주시겠어요."
남자는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나경은 이때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걸음이 빠르다 싶었는데, 조금 지나니 자신이 뛰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처음 눈에 띄는 카페에 몸을 숨겼다. 커피 한 잔을 홀짝이며 다시 바다로 눈을 돌렸다. 나경은 낯선 사람의 낯선 친절에 놀라 스스로 유리벽 안에 갇혀버린 자신의 모습을 거울 같은 유리창 앞에서 마주하고 있었다.
좀 안정이 되자, 나경은 잠자리를 걱정해야 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숙소를 잡아야 한다는 조급함에 바다를 떠났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했던가. 나경은 강릉 도심의 여관이나 모텔에 혼자 들어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래도 어디선가 자긴 자야 한다. 나경은 용기를 내어 관광호텔이라는 곳에 들어섰다. 호텔 프런트의 단정한 유니폼의 앳된 안내원이 묻는다.
"예약하셨습니까?"
"아, 아뇨! 빈방 하나 없을까요."
"예약하지 않으셨다면, 저희 호텔에는 방이 없습니다. 요즘 스키철이라서."
너무나 친절한 말투와는 달리 안내원은 좀 이상한 여자에게 참  안됐다는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나경은 그 한마디 아니, 그 눈초리를 피해 무작정 호텔을 나왔다. 강릉 시내는 어두컴컴해지고 있었고, 그 어둠만큼이나 나경의 마음도 어두웠다.
`‘이제 어떻게 하나?’
나경은 택시를 잡아타고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했다.
터미널에는 서울행 버스표가 매진이었고, 혹 출발 전 도착하지 않은 사람들의 자리가 날지 모르니 기다려보라 했다. 나경은 불확실한 상황에 자신을 맡길 수 없을 정도로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다시 택시를 타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다행히 밤 9시 20분에 출발하는 서울행 기차표를 손에 쥘 수 있었다. 저녁 6시였다. 3시간여의 시간은 참 지루했다. 간단히 김밥으로 저녁을 해결하고도 낯선 강릉 시내를 거닐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무 할 일은 없었지만, 사람 북적이는 역내 의자가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이번 여행은 줄곧 편안함에서 나경을 몰아내고 있었다. 또 다른 걱정이 시작된다. 밤 기차를 한 번도 타본 적이 없는 나경은 낯선 사람과 몇 시간 앉아 있어야 하는 상황, 또는 텅 빈 기차에 무서운 사람들이 타고 있을 가능성에 대한 염려가 시작되었다. 아무 할 일 없는 지루함은 느리게 가지만, 걱정되는 상황은 언제나 너무 빨리 다가온다.
9시 15분에 기차는 도착했다. 나경은 밤 기차에 올라탔다. 밤기차는 나경의 생각과는 달리 북적거렸다. 그리고 나경의 옆에는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가 앉았다. 그들은 모두 열심히 살아가는 생활인들인 듯 보였다. 하기야 누가 여흥을 접고 토요일 저녁에 일요일 새벽을 가르는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겠는가?
기차는 새벽에 나경을 서울역에 떨어뜨렸다. 나경은 그 새벽에 집의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잠결에 대꾸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문 안에서 들렸다.
"엄마, 나야. 나경이."
"나경이! 너 웬일이냐?"
어머니는 나경의 새벽 귀가를 의아해하며 문을 열었다.
"친구 시댁식구가 갑자기 와서 그냥 올라왔어. 친구 집이 아닌 데서 자기도 그렇고, 같이 간 친구가 그냥 올라가자고 해서.”
나경은 준비해둔 거짓말을 티 내지 않게 얘기하려고 애썼다. 티가 난다 해도 잠결의 어머니는 알 수 없었을 거다.
"거참, 네 친구도 그렇지. 그렇다고 이 밤중에 운전해서 올라온단 말이냐. 밤 운전이 얼마나 무서운데."
"글쎄 말예요."
"어쨌든 피곤할 테니, 어서 자."
나경은 정말 피곤했다. 너무나 오랫동안 깨어 있었던 것 같았다.

월요일 점심시간.
나경은 다시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는 동료가 점심을 먹고 있었다.
"나경씨, 뭐 해! 빨리 안 오고?"
"네. 지금 가요!"
일탈을 꿈꾸는 것은 일탈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서 사람들은 일탈을 감행한다. 일탈은 나경에게 현실을 견디라 한다. 나경은 지금 바다가 비치는 거울 앞이 아니라 사람들의 물결 속, 즉 현실로 다시 돌아왔다. 한동안은 그 현실을 견딜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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