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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와 해변 |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

2012. 10. 15.

 

 

 

전화와 해변, Beach scene with telephone


살바도르 달리

Salvador Dali, 1904-1989

 

  

 

관련 링크

네이버캐스트      http://bit.ly/RtgkTS

Works of Art       http://www.salvador-dali.org

Wikipedia           http://bit.ly/Rw1cIv

 

 

경선은 도시를 떠나면서 휴대전화를 꺼버렸다. 떠남은 단절이어야 한다. 이건 진리다. 너무 거창하지만, 무작정 떠남에는 가끔 거창한 이유가 필요하다.
겨울 바다는 시끄러웠다. 파도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도시에서는 인파(人波)가 소음을 만들어내더니 사람들을 걷어낸 바다도 시끄럽긴 마찬가지다. 바람과 파도가 만나면 훨씬 무서웠다. 민박집의 창은 너무 허술해서 바람이 조금만 흔들어대도 날아갈 듯이 비명을 질러댔다.
핸드폰을 켰다.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부재중 통화, 음성메시지, 문자메시지를 확인했다. 모두 텅 비어 있다. 갑자기 이야기하고 싶은 욕구가 꺼져버렸다. 다시 꺼버린다.
태풍이란다. 해질 무렵이 되자 비바람이 더 세차게 휘몰아쳤다. 이제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이 소란해진다. 배를 튼튼히 묶어두어야 하고, 밖에 널어둔 건조물들을 걷어내야 하고, 이 와중에 철없이 신 나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집안으로 들여야 한다.
경선은 외지인이므로 이곳에 소유물도 아는 이도 없다. 경선이 해야 할 일은 자기 한 몸 무사히 건사하는 것이고, 경선이 아는 유일한 방법은 민박집에 콕 처박혀 있는 것이었다. 경선은 자신이 아는 유일한 방법으로 철저히 자신을 보호하고 있었다. 겨울 바다에 태풍이라니.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좀 심하다 싶을 만큼 억세게 재수 없는 우연들.
도시를 떠나온 지 10시간 남짓 지났다. 아무 말 없이 떠나왔다. 누군가에게 알려야 한다. 자신이 어디 있는지. 누구도 걱정하지 않게. 이 위험 속에서도 안전하다고.
핸드폰을 켰다. 부재중 통화, 음성메시지, 문자메시지를 확인했다. 모두 텅 비어 있다. 다시 꺼버린다. 누구에게 알릴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다.
아침이다. 도시를 떠나온 지 18시간이 지난 듯하다. 지난밤의 태풍은 말끔히 사라졌다. 부서진 배를 손질하는 손길이 분주하고 건어물들은 다시 아침 햇살 아래 축 늘어졌고, 아이들은 아침밥을 먹자마자 집을 뛰쳐나간다.
경선은 민박 주인네 마루에 앉아 뉴스를 본다. 도시도 태풍을 겪었다. 도로는 침수되었고, 몇몇 사람이 다치고 죽었다. 도시에서는 태풍이 아니라도 하루에 몇몇 사람들이 다치고 죽는다. 사람이 다치고 죽는 게 특별하지 않은 일상인 도시에서 누가 사라졌다고 특별할 건 없다.
휴대폰을 켠다. 부재중 통화, 음성메시지, 문자메시지는 여전히 텅 비어 있다. 도시에서 18시간, 아니 이제는 막 19시간이 되었다. 사람이 사라지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시간이다. 완전한 사라짐은 누군가의 부재(不在)에 대한 인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아무도 경선의 부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경선은 휴대폰을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겨울 바닷가의 모래밭은 휴대폰을 안전하게 품에 안는다.

도시로 가는 버스 안에서 경선은 핸드폰을 켰다.
단축다이얼 1번을 누른다. 집이다.
"엄마, 어제 밤새 작업하느라 못 들어갔어요. 지금 들어가요. 네? 아, 나가신다고요? 열쇠 맡겨두고 가세요. 네."
단축다이얼 2번을 누른다. 명석의 집이다.
'지금은 부재중입니다. 전하실 말씀이 있으면 메시지 남겨주세요.'
내 남자친구인 그는 그야말로 사라졌다.
단축다이얼 3번을 누른다. 회사다.
"……."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리기 전에 끊어버렸다. 이제 다니지 않을 회사에 변명할 필요는 없다. 가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다. 경선은 어제 사표를 냈다. 떠나기 전까지는 이유를 몰랐는데 돌아오면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전화가 오지 않았다.
이것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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