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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풍경

눈먼 암살자

2020. 10. 4.

 

<눈먼 암살자>는 부커 상과 해밋 상을 수상한 캐나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대표작이다.

<시녀 이야기>, <그레이스>의 작가이다. 두 작품 모두 드라마로 제작되었고, 그중 <그레이스>는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 삼중 액자 구조이다.

억눌린 현실 - 아이리스의 자서전.

숨겨진 실재 - 로라의 이름으로 출간된 소설 <눈먼 암살자>,

도피처로서의 환상 - 소설 <눈먼 암살자> 등장인물인 남자가 여자에게 들려주는 공상과학소설.

이 모든 이야기가 진실을 향해 달려간다.

이야기는 복잡하게 얽혀있고, 반전도 있다. 

그 모든 것을 말할 수 없기에, 오늘의 단상에서는 그녀들의 사랑이야기만 따라간다.

 

아이리스와 로라는 자매다.

자매는 한 남자를 사랑한다.

자매는 피크닉에서 한 남자, 공산주의자 알렉스를 만난다.

셋은 함께 사진을 찍는다.

 

그녀는 그의 사진을 단 한 장 가지고 있다.

그것은 피크닉을 즐기고 있는 그녀와 그 남자,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사진이다. 뒷면에는 연필로 ‘피크닉’이라고 쓰여 있다. 그의 이름도, 그녀의 이름도 아닌 그냥 ‘피크닉.’ 그녀는 이미 이름을 알고 있고, 그래서 적을 필요가 없다.

눈먼 암살자 | 마거릿 애트우드

 

명망 있는 집안은 도산 위기에 처하고 아이리스는 아버지를 위해 정략 결혼을 택한다. 아이리스의 결혼으로 동생 로라 역시 그들의 집에 들어가 살게 된다. 의지할 곳 없는 자매는 욕망과 권위의식으로 인해 각자 다른 모습으로 희생되어간다.

 

숙녀의 증명서는 바로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남편과 아내는 한 사람이고 그 사람은 바로 남편이다.

아내의 역사 | 매릴린 옐롬

<아내의 역사>에서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아내에 대한 글이다.

돈을 벌 필요가 없었기에 돈을 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상류층에서 자란 여성은 전업주부가 되는 경향이 강했다.

<눈먼 암살자>의 아이리스, 전후 캐나다 여성의 지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소설 속 소설 <눈먼 암살자>에서 그녀가 알렉스를 다시 만나는 장면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목요일, 나는 알렉스 토머스를 보았다.

[…]

나는 보도에서 내려서 그를 향해 길을 건너가기 시작했다. 신호등 불이 다시 바뀌었다. 나는 도로 한 가운데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다. 차들이 경적을 울렸다. […]

그때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가 나를 보았는지 처음에는 확실하지 않았다. 나는 물에 빠져 구조를 간청하는 사람처럼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이미 나는 마음속에서 배반을 저질렀다.

그것이 배신이었던가, 아니면 용기 있는 행동이었던가?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그 두 가지 모두 미리 계획할 필요가 없다. 그런 것은 한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나는 법이다. 이미 침묵과 어둠 속에서 그것을 거듭 연습해 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너무나 깊은 침묵, 너무나 깊은 어둠이라서 우리 자신은 그것을 모르는 것이다. 앞은 보이지 않지만 확신에 찬 발걸음으로 우리는 기억하고 있는 춤을 추듯 앞으로 발을 내디딘다.

눈먼 암살자 | 마거릿 애트우드

 

욕망과 권위의식에 억눌린 부유한 여자의 준비된 일탈.

손을 내민 것은 순간이고, 마음속에서 수없이 연습한 배반은 살고자 하는 생존본능이다.

앞은 보이지 않지만 확신에 찬 발걸음으로.


짙은 제복을 입은 남자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방법으로 전보를 배달해 준다.

“알리다, 상실, 유감.” 조심스럽고 중립적인 단어들, 뒤에 이런 질문을 감춘 단어들, “뭘 기대했던 거야?”

눈먼 암살자 | 마거릿 애트우드


알렉스의 전사 소식.

하지만 드러내놓고 슬퍼할 수 없는 소식.

 

전쟁이 끝난 지 열흘째 되던 날, 내 동생 로라는 차를 몰던 중 다리 아래로 추락했다.
눈먼 암살자 | 마거릿 애트우드

 

희생은 빛을 잃고 사랑마저 잃어버린 로라의 죽음.

사랑도 잃고 로라의 희생도 알지 못했던 눈먼 아이리스의 회한.


그 사진은 잘린 것이다. 3분의 1가량이 잘렸다. 왼쪽 하단에는 손목 부분이 잘린 손이 풀밭 위에 놓여 있다. 그것은 다른 한 사람의 손이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간에 항상 사진 속에 있는 그 사람. 모든 것을 기록할 그 손.
눈먼 암살자 | 마거릿 애트우드

 

사진에서 잘려나간 한 사람.

왼쪽 하단에 손목 부분이 잘린 손의 주인공.

이 이야기의 반전이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사진뿐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이야기.

사진은 행복에 관한 것이고, 이야기는 그렇지 않다.

눈먼 암살자 | 마거릿 애트우드

 

잘려나간 사진 한 장으로 남겨진 행복.

억압과 불행 속에서 삶을 이어가게 한 지푸라기였고, 진실을 기록해야만 했던 동기가 된다.

 

그녀들의 사랑은 상실도 있고, 상처도 있다. 그래서 슬프다.

그러나, 그녀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투쟁했다.

로라는 희생으로(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리스는 기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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