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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사이 |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

2012. 10. 10.

 

  


둘 사이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1866-1944

 

  

 

 

 

 

 

관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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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pedia           http://bit.ly/SL9Gvh

 

 

병원 앞 건널목은 유난히 신호대기시간이 길다.
자신의 볼품없음이 아무런 방패막이 없이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어야 하는 상황은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다. 아니 두렵기까지 하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바로 이 건널목에서이다.
의사는 최대한 너그러운 그러나 습관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다리의 완치는 깁스를 풀고 회복상황을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희망을 가지세요. 가장 훌륭한 치료는 환자의 희망이니까요?"
의사는 불확실한 진단에 환자의 희망을 처방하고는 책임을 회피해버렸다. 교통사고로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은 한쪽 다리에 대한 불안을 간직한 채 불편한 한 달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에 대한 반응은 대인기피증으로 드러났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설명해야 하는 일, 그것은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일 중의 하나다. 동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사람들, 동정을 동정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서툰 애를 쓰는 사람들에게 달갑지 않지만 고마움을 표시하고, 또한 그들 때문에 마음 상하지 않았음을 표현하여 그들을 배려하는 일, 모두 그리 쉽지 않았다. 불안한 정황이 현실이 되기 전에는 되도록 사람을 만나고 싶은 않은 것이 당시 심정이었다.
그 한 방편으로 병원을 집 근처로 옮기고, 의사에게 9시 정각에 정기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부탁을 했다. 그 너그럽고 부지런한 의사는 인도주의 측면에서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리하여 진료대기실에서 서로 알지도 못하는 똑같은 처지인 사람들을 대하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
문제는 건널목이었다.
신호대기시간이 길어 그 앞에서 호기심과 동정의 시선으로, 또는 짐짓 관심 없는 체 시선을 회피하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관심은 견디기 힘들었다. 그들을 다시 볼 것도 아니고 나를 아는 이도 아니고, 더욱이나 내 생각만큼 나에게 관심이 있지도 않건만, 여하튼 그들이 싫었다. 대인기피증을 점점 중증이 되어갔다.
그 후, 인적이 드문 새벽에 병원에 가기로 했다. 텅 빈 병원에서 딱히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 많은 건널목보다는 텅 빈 병원이 편했다. 그리고 며칠은 그런대로 편안했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녀는 그 새벽에 건널목 앞에 서 있었다.
무방비상태에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익명의 다수도 싫지만, 단 한 명의 특별한 시선도 달갑지 않기 때문이다. 신호대기시간이 긴 이 건널목은 그녀와 내가 어쩔 수 없이 마주 보고 서 있는 상황을 연출했다. 건널목은 우리를 꼼짝 못하게 잡아두고 있었다. 이른 새벽에 나는 단정한 정장차림의 그녀가 신기했고, 그녀는 목발 짚은 내 모습을 신기해했다.
첫날은 당황스러운 순간으로, 둘째 날은 있을 수 있는 우연으로 스쳐 지나갔다. 셋째 날부터는 그녀가 미소를 지어 보내면서 그녀와의 만남은 우연의 경지를 벗어났지만 난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그녀의 미소에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녀의 순수한 호의를 의심하는 것도 아니면서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 졸렬함이 더 싫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 시간에 단정하게 차려입고 그 건널목에서 나에게 보답 받지 못하는 미소를 지었다. 건널목을 건너면서 한쪽은 미소를 보내고 한쪽은 미소를 회피하며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로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언제나 엇갈려 지나갔을 뿐이다.
의사는 상태가 호전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석고로 둘러싼 희멀건 다리를 쳐다보노라면 의사의 말이 그리 신통하게 들리지 않았다. 99%의 완쾌와 1%의 불치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환자는 99%의 희망보다는 1%의 절망에 쉽게 동화되기 마련이다. 1% 불치의 가능성은 현실이 되면 100%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새벽 건널목 앞에서 지어 보내는 그녀의 미소 앞에 나는 놀림감이 되어버리는 느낌이 들곤 했다. 뭔가 나를 꿰뚫어보는 듯한 느낌이 불쾌했다.
어느 날인가, 그녀는 나에게 말을 걸려고 시도했다. 그녀는 건널목을 건너오지 않았다. 미소를 띤 채 건널목 저편에 그냥 서있었다. 건널목에 들어서서야 그것을 깨달은 나는 진퇴양난이었다. 그녀의 의도를 해석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했다. 그렇다고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건널목을 건너고 있는 내게 말을 걸려는 그녀 앞을 그냥 그렇게 틈을 주지 않고 빠르게 스쳐 지나가 버렸다.
"저, 여보세요."
그녀는 낮지만, 새벽을 울리기에 충분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지만, 나는 못들은 채 스쳐 지나갔다. 내가 완쾌되기라도 한 듯 빠른 속도로 그녀 앞을 지나쳤다.
내가 두려워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내 처지를 이해하는 척하는 그녀가 싫은 것인가? 그녀의 순수한 한마디를 곡해할 자신의 유약함이 두려운 것인가? 그 해답을 찾기 위한 골머리를 썩이며, 병원입구를 들어서고 있을 때 등 뒤에서 소름 끼치는 금속성 굉음이 생각을 방해했다.
빠른 속도로 달리던 차가 속도를 줄이는 소리.
차에서 내린 사람이 도움을 청하는 소리.
병원에서 뛰어나가는 흰 가운의 무리.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소리.
다시 한 번 소름이 끼친다.

그 후, 건널목에서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쓸데없는 상상은 하기 싫었다. 그녀는 단지 다소 불편한 이에 대한 쓸데없는 동정을 그만둔 것이리라. 이제 그녀의 인생으로 돌아간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편했다. 달리 다르게 생각해볼 도리도 없었다.
의사는 너그럽지만, 의례적인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동안 고생하셨지요? 치료는 잘 되었습니다. 깁스를 풀었으니 보름에 한 번 물리치료만 받으세요. 달리 어떻다는 것은 아니고, 만약을 위해서."
의사는 만약의 가능성을 안은 완쾌를 진단했고, 물리치료를 처방했다. 나는 만약의 가능성을 잊어버렸다. 목발 없이 두 발로 걸을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만약은 없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병원 문을 나서며 푸른 하늘과 봄을 만끽할 수 있었다.
건널목에서 나는 이제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 서 있음을 알았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미소에 맘껏 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일순간 그녀에 대한 미안함과 걱정이 엄습해왔다. 사람이란, 자신의 불안에 대한 대처와 남에 대한 배려를 동시에 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그 순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저편에 있었다. 내가 있던 바로 그 자리. 휠체어에 앉아 고개를 떨어뜨린 채 넋을 잃고 있는 그녀.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가 근심 어린 손길로 휠체어를 밀고 건널목을 건너고 있었다. 나도 건널목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녀가 무심결에 잠시 고개를 들었을 때 눈이 마주쳤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도 모르게 내 입가에는 어설픈 미소가 지어졌다.
건널목의 이편과 저편이 뒤바뀌어버린 순간.
그녀 또한 나와 똑같이 내 미소에 고개를 돌려버렸다.
나와 똑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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