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덧칠하기/그림, 그리고

검은 사각형 | 카지미르 말레비치(Kasimir Malevich, 1878-1935)

2012. 10. 13.

 

 

 

  

검은 사각형,  Black Square


 

카지미르 말레비치

Kasimir Malevich, 1878-1935 

 

  

 관련 링크

네이버캐스트      http://bit.ly/WeLKBF

Works of Art       http://bit.ly/WeMdUf

Wikipedia           http://bit.ly/WeLAKA

 

 

 

경리과 성희는 오전에 거래처에 송금하기 위해 은행을 가야 했다. 밖이 추웠으므로 코트를 꺼내기 위해서 여직원 휴게실로 갔다. 캐비닛에서 코트를 꺼내는데 배가 살살 아프다. 주저할 겨를 없이 급하게 화장실을 다녀왔다. 속이 후련했다. 다시 돌아왔을 때 돈이 없어졌다. 뱃속이 다시 아려온다.
일반적인 도난사건이라면 재수 없는 개인의 불운으로 돌렸을 테지만, 이번 일은 공금이었고 또한 그 액수가 만만찮았기 때문에 말이 날 수밖에 없었다.
성희는 하나둘 휴게실을 드나드는 여직원들에게 자신의 난처한 상황을 하소연했고,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자리에 돌아와서는 도난사건의 정황과 자신의 동정심에 약간의 군더더기를 붙여 옆 사람에게 이야기를 전했다. 그렇게 회사 전체가 실제 사실과 더불어 눈덩이처럼 커진 군더더기를 알게 되었다.
성희는 우선 변통할 수 있는 곳을 수소문해서 겨우 거래처에 송금할 금액을 마련해서 송금하고 돌아 나오는데, 바로 그 은행에서 도난당한 액수와 비슷해 보이는 두께의 돈을 입금하는 윤성을 보았다. 우연치고는 상황이 좀 묘했다.
성희는 마음에 담아두는 성격이 못된다.
휴게실에서 윤성을 만나자 바로 그 돈의 출처와 사용처를 물었다. 윤성도 회사에 돌아와서 도난사건에 대해 들었으므로, 그 당사자인 성희의 물음이 담고 있는 의도 때문에 불쾌했다. 성희는 윤성이 결백하다면 자신의 물음에 답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고, 윤성은 아무 죄도 없는 자신이 왜 이따위 물음에 답해야 하는지 수긍할 수 없었다.
사건은 여직원 전체의 사건으로 발전했다. 용의자가 없었다면 애써 범인을 찾으려고 하지 않겠지만, 용의자가 있다면 그가 아님을 증명해야 한다. 도둑일지도 모르는 이와 함께 일한다는 것은 어쩐지 개운치가 않다.
점심시간에 여직원들이 소집되었다.
성희의 정황 설명을 듣고는, 모두가 윤성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윤성은 대답을 거부했다. 다만, 자신은 결백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윤성이 대답을 거부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유죄의 심증을 굳혔다. 그러나 심증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각자 자리로 돌아가 일을 하였지만, 오늘의 핫이슈가 잦아들진 않았다. 장소가 여직원휴게실이라는 여직원만의 공간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남자 직원은 뒤에서 비웃기나 하는 참 편리한 구경꾼에 불과했다. 여직원들은 성희의 부주의함과 윤성의 불명확함에 대해 성토했으나, 아무것도 해결할 수는 없었다.
오후에 김 부장이 성희를 불러 얘기를 했다.
윤성은 내가 잘 안다. 그럴 사람은 아니다. 윤성이 마음이 아픈 모양이다. 증거 없이 한 사람만을 몰아대는 건 옳지 않은 것 같다. 뭐 그런 얘기였다. 성희는 화가 났다. 모든 해결의 열쇠는 윤성이 쥐고 있다. 그녀가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돈에 대해 해명을 하면 된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을 회사 상사까지 끌어들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상사가 윤성 편을 드는 것도 심기를 건드렸다.
김 부장의 행동은 고스란히 여직원들에게 전해졌다. 사람들은 김 부장과 윤성의 관계에 대해 수군거렸다. 오전의 도난사건은 어느새 오후의 불륜스캔들로 변해 있었다.
아무것도 증명되지 못한 채 그 소란한 틈새에서 하나둘 빠져나갔다. 퇴근 시간이 된 것이다. 이 세상 어떤 사건도 퇴근 시간을 막을 수는 없다.

다음 날 아침.
성희가 제일 먼저 회사에 도착했다. 유니폼으로 갈아입기 위해 가장 먼저 들르는 곳이 여직원휴게실이다. 휴게실 문이 잠겨 있었다. 문고리를 돌려봤지만, 문이 열리질 않았다. 문을 두드려보고 당겨보았으나,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던 다음날, 우연히도 이런 일이 생기다니 불길했다.
성희는 문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여직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열쇠를 가진 직원이 아직 출근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둘 모인 그중에 윤성이 보이질 않는다. 어제의 일 때문인지 닫힌 문이 무슨 의미가 있는 듯 불길하게 느껴졌다. 성희는 저 닫힌 문 뒤로 윤성이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왜 그녀는 문을 열지 않지? 문을 열지 않는 것일까, 문을 열지 못하는 것일까. 그녀가 차라리 문을 열지 않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문을 열지 못할 상황이라면 그건 그녀가 저 문 뒤에서 죽어 있다는 이야기니까.
이야기가 비약이 심하다고 생각한다. 어제 일은 누군가 죽어나갈 정도의 일은 아니라고 되뇐다. 그건 단순한 도난사건일 뿐이야. 그러나 자신이 억울하게 의심받는다면 죽고 싶을 수도 있을 것 같아. 하지만, 이건 단순한 도난사건이야.
누군가 열쇠를 가져왔다. 드디어 문이 열렸다.
그 어느 아침보다도 새하얀 아침임에도, 열린 문을 통해 보이는 공간은 한순간 새까맣게 드러났다.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까만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자 차츰 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 이전에는 텅 빈 공간이었던 것이다. 윤성은 대부분의 사람이 휴게실에서 사라질 즈음 나타났다.
그리고 그 사건은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다만, 회사는 개인 캐비닛 열쇠를 다시 점검하여 고장이나 분실에 대한 후속책을 마련했고, 사람들은 아무리 급해도 캐비닛 문을 잠그는 것을 잊지 않았고, 성희가 있을 때는 은행에 가는 걸 꺼렸고, 윤성이 있을 때는 돈을 조금 더 깊숙이 밀어 넣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상사들은 섣불리 남의 일에 끼어들려 하지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