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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엾은 천사 |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

2012. 10. 13.

 

 

 

 

  

가엾은 천사, Poor Angel 


 

파울 클레

Paul Klee, 1879-1940

 

  

 

 

 

 

 

 

 

 

 

관련 링크

네이버캐스트      http://bit.ly/SSb1R9

Works of Art       http://bit.ly/X5aqvI

Wikipedia           http://bit.ly/SSaMoY

 

 

아이는 심장박동기의 가냘픈 떨림을 제외하고는 살아 있다는 표시를 거의 하지 않았다. 내일이면 영원히 자신의 존재를 거두어 가버릴 것이라는 걸 알고나 있는 걸까? 신은 아이가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일 때 그를 데려감으로써, 가장 큰 아픔으로 아이를 기억하게 하였다. 신은 내게 공평하지 않았다.

아이에게서 산소호흡기를 제거하기로 했다. 아이 엄마를 설득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아이는 아빠가 운전하는 차에 타고 엄마 무릎에 앉아 있다가 사고를 당했다. 그 충격에 어른들은 회복 가능한 중상을 입었지만, 아이는 산소호흡기를 달게 되었다.
깨어나지 않은 아이 옆에서의 석 달은 아내를 미치게 했다. 아내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고, 앞으로 아이가 없는 세상에 남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이에게 지속적인 자극을 주면 그에 반응하면서 깨어날 수도 있다는 의사의 조언을 따라, 아내는 아이와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모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내는 아이의 대답을 듣고 있었다. 아이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로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아내가 도리어 아이가 살아 있던 과거에 살고 있었다. 난 정지된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아이와 행복했던 과거에서 살고 있는 아내를 보며, 아이도 아내도 없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었다.
의사는 거의 가망이 없지만, 마지막까지 희망을 가지라고 했다. 아홉 살의 아이에게 마지막까지라니. 내 아이를 상대로 마지막이란 단어를 떠올린 적이 있었던가?
의사가 말한 마지막은 석 달째 접어들면서 시작되었다. 의사는 우리 부부와 아이를 위해서 이제 산소호흡기를 떼자고 완곡하게 얘기했다. 아내와 나는 분개했다. 의사는 우리보고 아이를 죽이라는 것이었다. 영원히, 그것도 우리 모두를 위해서? 이 병원이 아니어도 병원은 많다. 우리는 결코 아이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고 문을 나섰다.
병실로 돌아온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각자 생각에 빠졌다. 이 순간 우리는 서로 남남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난 아내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아니,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옳을 게다. 나만의 생각에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속마음이 외부로 표출될까 봐 극도로 조심하면서.`그것이 정말 모두를 위하는 것이 아닐까?
아내에게 아이의 산소호흡기를 벗겨주자고 얘기했다. 아내는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아이의 아버지가 할 소리인가 의아해했다. 내가 없더라도 혼자서 아이를 돌볼 수 있다고 했다. 아내는 적어도 아이가 우리 행복의 전부였던 시간만큼이라도 아이를 지켜줘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소리쳤다. 그랬다. 우리는 지난 9년 동안 아이와 함께여서 행복했다. 그에 비하면, 우리가 슬퍼한 시간은 석 달에 채 못 미친다. 슬픔은 언제나 너무 길고, 행복은 언제나 너무 짧다. 우리가 아이와 함께 보낸 그 지독한 고통의 시간이 3개월밖에 되지 않았다니 …….
"여보, 우리가 아프지 않기 위해서 아이를 아프게 하지 말자. 아이를 놓아주자."
내 아이를 포기하는 변명치곤 너무 빈약한 이유였다. 난 아내를 안았다. 사랑스럽던 아내는 내 품에서 벗어나 내 곁을 떠났다. 아내가 다시 돌아왔을 때, 아내는 아이를 떠나보내는데 동의했다.
"정말, 이게 아이를 위하는 것이겠죠?"
마지막 의문을 내게 던지며 울음을 터트렸다. 난 아내를 껴안고 한참을 아이처럼 울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계속 되뇌고 있었다. 이게 아이를 위한 거야, 이제 고통은 없을 거야. 더 나은 곳으로 가는 거야.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 믿음보다는 의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아내의 마지막 의문이 다시금 내 가슴을 쳐댔다. 정말 이게 아이를 위한 것인가? 우리만을 위한 것은 아닐까? 누가 삶 저편의 삶에서 아이가 행복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있는가?
"이제 아이는 자유롭겠죠, 여보!"
난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드디어 내일로 잡혔다.
아내는 아이가 떠나는 순간을 보려 하지 않았다. 아니, 아이를 떠나보내지 않음으로써 영원히 마음에 품고 살려는 듯했다. 난 어쩔 수 없이 홀로 아이의 곁을 지켰다. 난 두려웠다. 이별의 시간을 빌미로 잊힐 수 있는 무(無)의 존재로 아이를 기억하게 될까 봐. 아내가 두려워한 것도 이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가엾은 천사, 우리 아이야.
넌 언제나 우리의 행복이었단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슬픈 건 이제 다시는 너로 인해 행복질 수 없기 때문이란다. 왜냐면, 우린 더 오랫동안 너랑 행복할 거라고 믿었거든. `
네가 가는 그 세상에서 누군가의 행복으로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다. 네가 있어 행복해진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네가 자라났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사람과 네 행복을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네 행복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이승과 헤어졌으면 좋겠다. 우리 아픔의 대가로 이 정도는 기도해도 되지 않을까?
아픈 이들의 신음 소리에도 불구하고 병원은 적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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