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의 기도, The Angelus of Gala 


 

살바도르 달리

Salvador Dali, 1904-1989

 

 

 

 

 

  

 

관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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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희가 죽었단다."
"숙희?"
"왜, 기억 안 나?"
난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숙희? 누구지?
"2학년 때 우리 반이었잖아. 너 바로 앞에 앉았었는데."
고교동창인 영선은 나보다 내 고교 시절을 더 잘 기억하고 있다.
내 앞자리? 고교 2학년.
그 순간을 떠올리려니, 새하얗게 퇴색되어 이제 얼굴을 알아볼 수조차 없는 졸업앨범 속에서 헤매고 있는 기분이다.
"왜 언제나 골골하던 얼굴 하얗고 말을 횡설수설하던 아이."
그제야 그 아이의 영상이 어렴풋이 스쳐 간다.
"우리 반에선 숙희를 그런대로 받아주던 게 너였던 것 같은데, 왜 모두 귀찮아했고 노는 데도 끼워주지 않았잖아."
그랬었나? 숙. 희. 이름도 기억 못 해서 영선의 기억을 빌려서 겨우 떠올린 그 아이는 내게 별 의미 없이 잊힌 채 3년의 세월이 흘렀다.
"죽었다고? 근데, 넌 어떻게 그 소식을 들었어? 연락하고 지낸 거야?"
"내가 숙희랑 연락할 일이 뭐가 있겠어. 숙희 어머니가 널 찾는대. 동창들을 통해 널 수소문한 모양이야."
"날? 왜?"
"나도 몰라. 어쨌든 동창들에게 수소문했는데, 겨우 나한테까지 연락이 닿은 모양이야. 공성병원 영안실이래. 갈 거지?"
망설여졌다. 영안실은 결혼식장만큼이나 가기 싫은 곳인데 영안실로의 초대라니. 그럼에도, 난 내일 그곳에 있을 것이다. 모른다면 몰라도 알고도 무시할 정도로 무례하게 보이고 싶지는 않다. 한편으론 왜 나를 찾는지 호기심이 이는 것도 사실이다.
숙희는 좀 모자라는 아이였다. 말은 횡설수설 앞뒤 논리가 맞지 않았고, 수업도 따라가지 못했다. 선생님도 포기한 듯 그 아이를 닦달하지도 않았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하ㅤㅇㅒㅆ고, 피부가 좋지 않아 하얀 버짐 같은 것이 일어났다. 가까이하면 정체 모를 뭐라도 옮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이들은 그 아이를 꺼렸다. 학교가 파하면 숙희 엄마가 숙희를 데리러 오곤 했는데, 숙희를 기억하려 하다 보니 얼굴보다는 숙희와 숙희 엄마가 나란히 하교하는 뒷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정확한 기억인지는 자신이 없지만, 그때 그들의 뒷모습은 보기 좋았다.
고교 2학년 때 우린 같은 반이었고, 숙희는 내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수업시간 중에도 집중을 못 했고, 수업 전에도, 수업 중에도, 수업 후에도 지금이 무슨 시간인지, 바로 직전에 선생님이 설명한 수업내용이 무엇인지, 내일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고개를 뒤로 돌려 내게 물어댔다.
숙희는 설명해줘도 이해가 안 되는지 이해하려 하지 않는 건지 똑같은 질문을 자꾸 해댔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짝도 있었으나, 숙희의 짝은 대답이 의미가 없는 끝없는 질문을 견디지 못하고 노골적으로 싫은 내색을 했다. 숙희는 말은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분위기는 정확하게 파악했다.
숙희는 짝을 포기하고 뒤에 앉은 내게 똑같은 질문을 해댔다. 난 그런대로 친절하게 설명하고 설명하고 또 설명했던 것 같다. 나 자신도 이유를 모르겠다. 숙희를 좋아했던 것도 아니고, 불쌍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나도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숙희가 꺼려졌다. 다른 아이들이 나와 숙희가 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했다. 숙희와 친해짐으로써 숙희와 같아지고, 숙희처럼 취급받을까 봐 내심 두려웠다. 그래도 난 숙희의 똑같은 질문들에 언제나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어느 날 숙희의 짝이 여느 때처럼 묻고 답하기를 하는 숙희와 나를 보면서 말했다.
"넌 정말 너무 착하다."
그것이 감탄인지 비웃음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나는 비웃음으로 받아들였다. 난 착한 아이가 아니고, 착하다는 말을 너무나 듣기 싫었다. 바보라고 하는 것 같았고, 숙희처럼 취급받는 느낌이었다. 그 한마디 때문에 숙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대답도 건성으로 했고, 계속되는 똑같은 질문에 면박을 주기도 했다. 내가 숙희의 짝처럼 노골적으로 싫은 내색을 하기 전에 숙희가 학교를 그만 두었다.
많이 아파서 더는 학교에 다닐 수 없다고 했다. 위독한 병이라고 했다. 학급에서 반장, 부반장이 병문안을 가기로 했다. 가고 싶은 사람은 같이 가도 좋다고 했다. 난 가지 않았다. 타인의 눈을 의식했다기보다는 정말 내가 갈 이유를 찾지 못했다. 난 숙희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친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으니까.

다음날, 영선과 함께 영안실에 갔다.
장례식장은 한산했다.
숙희의 어머니인 듯 보이는 이가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의례적인 조의를 표하고 숙희 어머니께 이름 석 자를 밝히자, 눈물이 마른 그녀의 눈에는 다시 눈물이 고였다.
"숙희는 언제나 네 얘기를 했단다. 숙희에겐 친구가 없었는데, 그 아이에게 친구가 되어 주어서 고맙다. 숙희는 외롭지 않게 행복하게 눈을 감았단다."
영안실을 나왔다. 햇살이 신경질적으로 따갑게 내리쬐고 있다. 난 기억조차 못 했는데, 숙희는 나를 친구라고 했단다. 이 순간 난 어떻게 해야 하지? 기뻐해야 하나? 죄책감을 가져야 하나?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자기의 또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모르는 모습이 아니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습. 약점일 수도 있고 단점일 수도 있는 모습.
살아가면서 그와 마주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건 행운이다. 행운은 언제나 나를 빗겨간다. 숙희는 내게 그런 존재였다.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내 안에서 튀어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착한 척하는 나. 내가 착한 척한다는 것을 아는 나. 착한 척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 봐 무서워하는 소심한 나.
옆에서 말없이 걷고 있던 영선이가 한마디 한다.
"괜찮아. 지금은 네 진심이 어떠했느냐보다는, 숙희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게 중요한 거야. 숙희가 너를 친구로 생각했고 친구가 있어서 한순간이라도 행복했다면 무엇이 진실인지 때문에 고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숙희는 네 친구니까, 그 정도는 이해할 거야."
그때 또 다른 내가 저 깊은 곳에서 튀어나온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을 단지 그 이유만으로 싫어하는 나. 아마 영선을 다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오, 제발 더는 나로 하여금 나를 만나지 않게 하소서. 아멘.

 

 

Posted by 밑줄긋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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