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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증 |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

2012. 10. 15.

 

 

 

현기증, Vertigo


 

살바도르 달리

Salvador Dali, 1904-1989

 

  

 

 

 

 

관련 링크

네이버캐스트      http://bit.ly/RtgkTS

Works of Art       http://www.salvador-dali.org

Wikipedia           http://bit.ly/Rw1cIv

 

 

현기증이 인다. 높은 곳에 오르면 종종 나타나는 증상이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바닥에 피투성이인 채로 널브러져 있는 나를 본다. 그것은 순간적인 환상이지만 강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 짧은 순간 그에 해당하는 끔찍한 고통을 실제 느낀다. 추락에 대한 공포 때문에 높은 곳이 싫다. 이건 병이지 싶지만, 일상생활에 별 지장을 주지 않으므로 굳이 치료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성장하면서 한 번쯤은 프로이트를 접한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무의식 저 깊은 곳에서 내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은 전문가가 아니어도 짐작할 수 있다. 이 정도는 의학적인 지식을 빌리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내가 모르는 것은 그 무언가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동안은 잠깐씩 중심을 잃긴 했지만 쓰러지기 전에 중심을 되찾을 수 있는 정도의 찰나였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강렬한 태양빛이나 지독한 허기에도 현기증은 인다. 이건 다만 그런 증상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그 잠깐의 현기증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 발을 헛디뎌 실제로 떨어질 뻔했다. 마침 옆에 있던 사람이 붙잡아주어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다.
의사를 찾았다. 의사는 원인을 찾기 위해 이것저것 물어댔다. 충격을 받을만한 사고를 겪은 적이 있는지, 추락사고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적이 있는지 물었다. 내 기억에는 전혀 없다. 부모형제 모두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으며, 나 또한 행복한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있다.
의사는 물리적인 추락이 아니라면 정신적인 추락에 대한 공포에 대해 알아보자고 한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의사는 인생에서 가장 높은 곳에 다다랐을 때 한순간의 추락을 두려워해서 육체적으로 환영과 현기증을 동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정말 말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난 인생의 정상에 선 적이 없다. 지금이 정상이라면 너무 허무해서 그야말로 어지러울 지경이지.
의사는 마지막으로 최면을 걸었다.
어린 시절 어느 때인가, 나는 높은 곳에서 동생을 밀어 버렸다. 어린 동생은 치료기간 내내 피투성이로 다녔다. 동생은 나 때문에 크게 다쳤다. 내가 동생을 그 높은 곳에서 밀어 버렸기 때문에.
최면에서 깨어났다. 최면상태에서 한 이야기의 진의를 알 수 없었다. 동생은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다친 적이 없다. 부모님도 동생이 크게 다친 적이 없다고 한다. 동생도 기억이 없단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가족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겨우겨우 찾아낸 추락사건은 계단에서 내가 동생을 업고 내려오다가 함께 굴러떨어진 것이 전부였다. 계단은 그리 높지도 않았고, 동생과 나는 많이 다치지도 않았다. 둘 다 빨간 머큐로크롬을 바르고 한동안 돌아다녔던 기억은 내게도 있다. 그게 기억의 전부다. 가족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그게 뭐?

난 병원에 다시 가지 않았다.
난 이유를 안다. 내가 의식하기 시작했으니, 의사가 알아내는 것도 시간문제이다.
그날은 교회에서 소풍을 가는 날이었다. 나는 동생을 돌봐야 했다. 부모님은 모두 일을 나가셨다. 교회친구들이 함께 가자고 집으로 왔지만 난 갈 수 없었다. 너무나 가고 싶었다. 동생이 귀찮았다. 동생만 없다면 갈 수 있는데. 그 와중에 동생이 업어달라고 떼를 썼다. 어린애가 어린애를 업었으니 무게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난 동생을 업었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을 얼마 남기지 않은 상황에서 난 동생이 너무 미웠다. 그 생각이 스치는 순간 발을 헛디뎠고 동생과 나는 굴러떨어졌다. 둘 다 많이 다치지 않았으므로, 부모님께 약간의 꾸중만 듣고서 마무리되었다.
나만 알고 있는 진실은 이렇다. 그 순간 동생이 너무 싫었고 죽어버렸으면 하는 생각을 해버렸고, 마침 발을 헛디뎌 떨어진 것이었다. 너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생각이라 나조차도 잊고 있었다. 영원히 잊었으면 좋으련만. 마음 저 깊숙한 곳에서는 기억하고 있었고 기억하라고 현기증을 일으킨 것이다. 내게 일어나는 현기증의 원인은 추락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죄책감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 지금까지 세상은 내게 착한 사람이라고 말해왔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난 견딜 수 없다. 내 안위를 위해 언제라도 누군가를 해칠 수 있는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차라리 현기증을 안고 위험 속에 살아가는 것을 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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