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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풍경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 파트릭 모디아노

2023. 1. 15.

과거는 밝힐수록 어두워진다.

 

내가 사건의 실상을 알려줄 수는 없다.

그 그림자만 보여줄 수 있을 뿐.

- 스탕달

 

작가 장 다라간은 잃어버린 수첩을 돌려주겠다는 남자의 전화를 받는다.

그리 중요하지 않았기에 찾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수첩이다.

남자는 수첩 속의 한 인물에 대해 알기를 원한다며 굳이 만남을 요구한다.

만남에서 남자가 묻는 토르스텔이라는 인물을 떠올리려 하지만, 과거의 시간은 햇빛을 받으면 흩어지는 연무처럼 어슴푸레하다.

 

유년의 기억이란 공백에서 떨어져나온 작디작은 편린일 때가 많다.

 

다라간은 토르스텔이라는 이름에서 촉발한 불완전하고 파편적이고 혼란스러운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자료'에 든 서류가 불러 온 감정 상태도 묘했다. 어떤 이름들 때문에, 그중에서도 아니 아스트랑이라는 이름 때문에, 그리고 행간도 없이 겹쌓인 그 모든 말들 때문에 그는 느닷없이 그의 삶의 편린들 - 대상의 모습을 일그러뜨리는 거울에 비친 - , 고열에 시달리는 밤이면 두서없이 우리를 따라붙는 그 편린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자료'를 종이서류철 안에 넣으려는 순간, 그의 눈길이 잊고 있던 아이 사진에 멎었다. 뒷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즉석 사진 세 장. 신원 미상 아동. 아니 아스트랑 수색 및 체포. 벤티밀리아 국경 검문소. 1952 7 21일 월요일.'

 

수상쩍은 사람들 틈에서 자라면서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던 그의 유년 시절. 남자가 모아둔 자료에서 나온 이름 하나가 어린 시절 기억을 소환한다.

아니 아스트랑.

 

다라간은 그 책을 오직 그녀에게 기별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썼다.

 

그리하여 <그 여름의 어둠>에서 아니 아스트랑의 눈길을 붙들 수 있는 단 한 대목은 여자와 아이가 팔레 대로에 있는 즉석 사진 가게에 들어가는 장면이었다.

 

첫 소설을 써내려가던 청년 시절.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들은 헤어졌고, 그녀와 다시 만나기 위해 그는 개인적인 전언을 전하는 심정으로 소설을 썼다. 그래서 그는 소설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한다.

 

다라간은 페랭 드 라라의 말을 떠올렸다. "내가 해줄 말이라곤 하나밖에 없군. 그 여자가 감옥살이를 했다는 것.” 만일 다라간이 그 이야기를 꺼내면, 그녀는 살면서 이보다 놀란 적은 없다는 표정을 지을 것이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하고는 이렇게 대꾸하지 않을까. "그 사람이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모양이지"라거나 "그래서 그 말을 믿었어, 우리 꼬맹이가?"라고. 그리고 그것은 진심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불편하거나 너무 고통스러운 인생 소사들을 결국에는 잊는다. 깊은 물 위에 눈을 감고 누워 물에 가만가만 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녀를 다시 만나지만, 다라간은 이유를 묻지 못한다. 회피일 수도 있고 망각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적당한 설명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길을 잃을까 두려워대로에 솟은 교통섬 너머까지 갈 엄두는 내지 못했다.

[]

아니는 쪽지에 주소만 덜렁 쓴 것이 아니라 이런 말도 덧붙여 썼다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그 큼직한 글씨는 구식 필체여서 생뢰라포레의 학교에서는 이미 쓰지 않는 것이었다.

 

아니는 모호한 이유로 또는 다라간이 떠올리지 못하는 이유로, 어린 다라간과 함께 지낸다. 다라간이 길을 잃어버릴까봐, 주소와 함께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라고 쓴 쪽지를 쥐어준다.

 

아침이 밝자 그는 커튼 사이로 들어와 벽에 오렌지색 얼룩을 만드는 햇살 때문에 눈을 뜬다. 처음에는 별일 아니려니 한다. 자동차 타이어가 자갈밭과 마찰하는 소리가 들린 뒤 엔진 소리가 멀어진다. 그가 그 집에 혼자만 남았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아직 얼마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아니는 어린 다르간을 방치했던 부모와는 달리, 길을 잃지 않게 염려해주는 의지할 수 있는 존재였다. 하나의 이름에서 시작하여 부모의 방치, 아니 아스트랑과의 유대, 그리고 이별의 과정을 떠올린다.

과거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소설은 아무 것도 묘사하지 않는다. 아니가 감옥을 간 이유도, 왜 다르간과 아니가 함께 했는지도, 아니가 다르간을 두고 떠난 이유도.

 

소설은 다르간과 아니의 서사가 아니라 기억의 모호성에 대한 이야기다.

옮긴이의 말처럼, 과거는 밝힐수록 어두워진다.

기억은 연속성을 갖지 않는다. 편린과 편린 사이를 불완전한 기억으로 메우기도 하고 또는 그냥 비워두기도 한다. 게다가 아니의 기억은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르간의 감정은 그 길 위에 남아있다.

버려져 혼자 남았다는 배신감.

자신을 방치한 부모에게 돌아가야 하는 무기력함.

이유를 모른다는 답답함.

그리고, 그리움.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 파트릭 모디아노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파트릭 모디아노 저 “내가 사건의 실상을 알려줄 수는 없다. 그 그림자만 보여줄 수 있을 뿐.” 프랑스 현대문학의 거장 파트릭 모디아노가 2014년 노벨문학상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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