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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풍경

채식주의자

2022. 6. 3.

 

마거릿 애트우드 <눈먼 암살자> 중에서

 

“네가 죽일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먹지 마라.”

“네가 먹을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죽이지 마라.”

“씹할 채식주의자들 — ‘모든 신들은 육식성이다.’ — 로라 체이스.”

 

한강 <채식주의자> 중에서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나는 아내의 움켜쥔 오른손을 펼쳤다. 아내의 손아귀에 목이 눌려 있던 새 한마리가 벤치로 떨어졌다. 깃털이 군데군데 떨어져나간 작은 동박새였다. 포식자에 뜯긴 듯한 거친 이빨자국 아래로, 붉은 혈흔이 선명하게 번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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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성의 신들이 만든 세상에서 인간의 채식은 배교(背敎)일까?

그래서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그리 힘겨울까?

육식을 권하면서도 원초적 육식성을 만나면, 낯설고 두렵다.

동물의 죽음을 목격하지 않고, 동물의 형태를 상실한 부위로 만나는 육식.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이지만, 아무것도 죽일 수 없는 가슴은 판도라의 상자 속 희망 같은 존재이다.

왜 희망은 항상 작고 연약할까?

하지만, 그마저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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