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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박스에서 | 에바 곤잘레스(Eva Gonzales, 1849-1883)

2012. 10. 8.

 

  

 

극장 박스에서, Une loge aux Italiens


에바 곤잘레스

Eva Gonzales, 1849-1883

 

 

관련 링크

네이버지식백과   http://bit.ly/TjJ6eh

Works of Art       http://bit.ly/OVUk3p

Wikipedia           http://bit.ly/TjIMwb

 


아름다운 당신에게 이 꽃을 바치오. 이 꽃과 함께 내 마음을 받아주오. 당신과 결혼하고 싶소. 부모의 소개로 만났지만 우리는 잘 맞는 한 쌍이 될 것이오. 부모는 누구보다 우리를 잘 알고 있소. 두 집안이 무엇을 나눌 수 있는지, 우리 두 사람이 무엇을 참을 수 있는지, 그리고 사랑을 쫓는 결혼을 하지 않아도 어디서든 사랑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오. 당신도 나만큼이나 잘 알고 있을 것이오.
다른 사람 눈에도 우리는 어느 한 쪽도 기울지 않는 완벽한 부부일 것이오. 그들이 스케치하고 덧칠해놓은 완벽한 부부상과 다르지 않을 거요. 자신과 똑같은 삶을 살아가는 또 한 쌍의 부부가 탄생함으로써 자신의 불행이 아직은 누군가가 꿈꾸는 행복이라고 자기최면을 걸 수 있을 터이니.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똘똘 뭉쳐 그들이 속한 세계를 더 견고하고 안전하게 만든다오. 그들은 이 견고한 안전한 혜택을 거부하고 벗어나려는 시도를  참지 못한다오.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할 손가락은 언제나 넘쳐 난다오.
몇 달 전에 사랑의 열정과 환희를 차마 잘라버릴 수 없어 야반도주한 한 쌍의 연인을 보시오. 여자는 헤프고 천박한 창부가 되어 있고 남자는 가문에 대한 책임을 저버리고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호색한이 되어 버렸지. 실제 세상 어딘가에서 죽을 때까지 행복한 부부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그들은 불행을 자초한 실패자일 뿐이오. 결코, 다시 돌아오진 못할 거요. 그들의 행복이 우리의 불행을 일깨우게 하진 않을 테니. 우리 세계의 허약함은 공공연한 비밀이오. 우리는 안전한 불행은 참을 수 있지만, 위험한 행복은 견딜 수 없다오. 이는 이 세계가 유지되는 비결이라오.
당신은 고상하고 아름다운 여인이고, 나 또한 품위를 아는 신사요. 우리 결혼은 가족의 안심과 집단 구성원의 환영 속에서 우리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증명이 될 것이오.
적당한 결혼이 될 것이니, 나와 결혼해주시오.

나는 당신과 결혼합니다. 당신의 꽃은 내게 감동을 주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예의를 갖춘 청혼임은 인정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사랑을 꿈꾸는 소녀도 사랑이 다가 아님을 깨달은 여인이 되었습니다. 부모의 성화도 있지만, 결정은 제 몫입니다. 물론 다른 결정은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결정의 몫을 다른 이에게 넘기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의 재력으로 저는 아름답고 고상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그 점은 믿습니다. 당신 말대로 품위를 아는 신중한 신사라 다른 사람의 손가락질 받지 않게 조심스럽게 사랑을 찾으러 다니겠지요. 틀 안에서의 일탈은 우리 세계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되니까요. 당신의 사랑도 감히 제자리를 요구하지 않을 겁니다. 서로에게 원하는 바를 명확히 하고 그 선을 넘지 않는다면 충분하진 않지만, 적당히 행복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은 의무를 다할 신사이니까요.
결혼식은 성대해야 합니다. 모두를 춤추게 하고, 푸짐하게 먹이고, 거하게 취하게 해서 아무 생각도 못하게 해야 합니다. 행복을 사려면 그 정도는 감당해야지요. 우리의 행복은 다른 이들의 인정이 필요하니까요. 그들의 입을 사들여야 하죠. 그들이 나가서 행복한 한 쌍이라고 말해줘야 하니까요. 그들의 결혼식에 우리가 그러했듯이.
거짓말은 아니지요. 우리는 정말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요. 적어도 그들만큼은 행복할 거라고 믿습니다. 행복의 기준은, 전통과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앞선 이들의 기준에 맞춰져 있습니다. 우리의 기준을 가질 수 없지요. 욕심이니까요. 안으로 곪더라도 밖으로는 드러나지 말아야 합니다. 죽는 순간까지 곪아 터지지 않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나는 화려한 결혼식을 올릴 겁니다. 신랑인 당신 곁에 서겠습니다. 당신의 초대에 응해 기꺼이 함께 하겠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연극을 볼 수 있게 조금만 조용해 주십시오.

공연이 끝나고 신사는 숙녀를 집에 데려다 줍니다. 품위 있는 신사의 매너입니다. 신사는 숙녀에게 가볍게 키스하며 자신이 행운아라고 말하고 아쉬운 듯 작별합니다. 숙녀와 헤어진 신사는 마차를 타고 극장 옆 박스에서 눈이 마주친 여인의 집으로 향하고, 신사와 헤어진 숙녀는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곧장 뒷문으로 나가 기다리던 마차에 뛰어들어 공연을 막 마친 배우의 품에 안깁니다.

얼마 후 신사와 숙녀는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들은 적당히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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