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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수전노 - 히에로니뮈스 보스 (Hieronymus Bosch, 1450?-1516)

2012. 9. 10.

 

 

 

죽음과 수전노

Death and the Miser

 

히에로니뮈스 보스

Hieronymus Bosch

1450?-1516

 

 

 

관련 링크

웹사이트 http://bit.ly/Nk3Gbz

위키백과 http://bit.ly/Nk2WmN

wikipedia http://bit.ly/Nk2Yev

 

“어이, 안녕들 하신가? 이런 인사가 좀 그렇군. 나를 만났으니 안녕할 리가 없는데 말이야. 이리 손님이 많으니 죽음을 앞두고도 분주하군. 어이, 영감. 그래 봤자 죽으면 난 당신만 데려갈 거야. 나랑 갈 곳은 아무것도 필요 없어. 난 짐꾼도 아니고 말이야.”
“잘 생각해봐. 이 금화 주머니를 줄게. 네 영혼을 내게 줘. 이걸 봐. 영감은 평생 돈을 만져봤으니 척 봐도 얼마나 될는지 알 거야. 내가 꽤 잘 쳐준 거 알지? 죽으면 한 줌 재야. 영혼은 한 줌도 안 돼. 밑지는 장사지. 하지만, 그동안 영감이 내게 해준 게 있으니 다른 사람보다 훨씬 후하게 쳐주는 거야. 탐욕과 오만으로 가득한 영감의 영혼은 충분히 내 탐욕을 자극해. 멋진 영혼이야. 그 값어치를 하겠지. 이 돈을 봐. 영감에게도 멋지지?”
“이게 마지막일지도 몰라요. 당신이 욕심에서 자유로워질 기회에요. 그 자유로움이 당신을 행복하게 할 거예요. 그동안 행복했나요? 당신은 욕심 때문에 아무것도 누리지 못했어요. 이곳을 봐요. 당신이 삶을 마무리하려고 하는데 당신 곁에 누가 있나요? 산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다들 당신을 이용하려는 악귀들뿐이죠. 당신이 바란 것이 이것인가요? 자, 지금 그 돈주머니에서 손을 놓아버려요. 그 돈은 당신 것이 아니고, 당신의 영혼은 당신 거예요. 이게 마지막이란 걸 잊지 마세요. 살아오는 동안 셈이 밝았으니 지금도 현명한 셈을 해요. 당신은 곧 죽을 거라고요. 돈은 살아 있는 자에게나 의미가 있을 뿐, 죽은 자에겐 살아 있을 때를 기억하게 하는 허상일 뿐이죠.”
아무도 없다. 그리고 너무 많다.
진저리쳐지는 가난 속에 살면서 오로지 가난하지 않으려고 열심히 일했다. 다른 사람 밑에서 일할 때는 성실하고 착실하다고 인정을 받았지만, 다른 이를 부리게 되면서 내 앞에서 굽실대는 사람들이 등 뒤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수전노라고 흉을 봤다.
상관없다. 내 창고는 금은보화로 가득 찼고 그 속에서 행복했다. 가난을 떠올리면서 내가 이룬 것들을 바라보며 스스로 대견했다. 가난한 이의 사정은 보이지 않았고, 사람들 말은 들리지 않았고, 금은보화는 말이 없었다. 가진 것이 많아지면서 더 가지고 싶은 탐욕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겨났다. 가족도 믿을 수 없었다. 모두 내게서 돈을 뜯어내려는 파렴치한들이었다. 자식들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 것만 바라보며 내가 죽기를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그들과 연을 끊었다. 죽음을 앞둔 지금 내 곁에는 아무도 없다. 
죽음이 눈앞에 있다. 너무 많다. 누구인지도 무엇인지도 모를 낯선 존재들이 나를 아는 척, 친한 척하며 말을 건넨다. 악귀가 돈을 건네며 영혼을 팔라고 하고, 천사가 악귀를 멀리하고 빈손의 자유로움을 느껴보라 하고, 죽음은 내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빈손의 자유로움이 진정한 행복일까? 내가 빈손일 때 행복했던가? 금은보화가 가득한 내 창고 속에서 불행했던가? 난 수전노다. 깨닫는 순간 선택은 간단했다. 악귀가 내민 돈주머니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나는 죽었다. 죽어서 다 짊어지고 갈 것도 아닌데 저렇게 악귀처럼 사냐고 주위에서 비아냥거렸다. 내가 죽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마치 저승 끝까지 가져가겠다는 듯이 돈주머니를 움켜쥐고 있는 볼품없는 주검을 보았다. 내 영혼은 빈손이었다. 돈에는 영혼이 없어 저승에 동행할 수 없었다.
“거봐. 내가 뭐랬어. 인간은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니까. 끝까지 놓질 못해. 놓아보지 못한 이는 놓았을 때의 행복을 믿지 못하지. 아무리 천사가 속삭인다 해도 말이야. 아무것도 없을 때의 불행을 경험한 사람은 더 그래. 돈주머니는 아직 내 거야. 다음 죽음으로 가보자.”
“젠장, 선함은 이제 설득력을 잃어버린 것 같아. 그는 살아가는 동안 불행했는데 그는 그게 불행인지도 몰라. 행복을 이해할 여지가 없는 거야. 가짜 행복이 판을 치니 천사는 점점 설 자리가 없어. 그래, 돈주머니는 네가 가져. 다음엔 내가 악귀를 할께.”
“오, 그건 안 돼. 이 내기는 이긴 사람이 돈주머니를 갖고 악귀를 하는 거지. 네게 불리하다고 규칙을 바꾸는 건 옳지 않아. 네가 이겼을 때 돈주머니만 갖고 악귀 역할을 내게 준다면 그땐 생각해보지. 뭐해, 다음 죽음으로 가자니까.”
“철없는 것들. 죽음을 갖고 장난이나 치고. 삶 가까이에 있고 싶어서 영면을 포기한 게 악귀들이야. 저것들도 모두 욕심을 버리지 못한 것들이지.”
“그럼, 내 영혼은 저 악귀가 가져가는 게 아닌가요?”
“돈주머니를 도로 가져갔는데 왜 영혼을 줘. 계약 파기야. 한 가지는 맞아. 네 영혼은 네 거야. 네 삶이 영혼의 투명도를 결정하지. 영혼의 질이 죽음의 질을 결정할 거야. 나 또한 안내자일 뿐 심판자가 아니지. 자, 이제 떠나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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