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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창가에서 편지를 읽는 여인 |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1632-1675)

2012. 9. 12.

 

 

 

열린 창가에서 편지를 읽는 여인 


Girl Reading a Letter at an Open Window

 

요하네스 베르메르

Johannes Vermeer, 1632-1675

 

 


 

 

관련 링크

네이캐스트 http://bit.ly/QczWOa

위키백과    http://bit.ly/QczPCc

wikipedia   http://bit.ly/QczKOU

 


우리 처음 만날 때 헤어짐을 예정하지 않았지만, 헤어짐을 앞에 두고는 만남에서부터 예정된 징조를 찾고 있는 나 자신이 우습게만 느껴집니다.
근데 과거는 생각나지 않고 미래는 생각하기 싫습니다.
당신과 헤어지려는 현재만이 내겐 유일한 현실입니다.
당신은 선천적으로 다정한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몰랐던 것은 사람의 본성이란 한 개인에게 국한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지요.
당신의 다정함이 내게만 속한 것으로 생각했을 때는 다른 모든 여자가 당신에게 보이는 호의는 내가 가진 것의 가치를 높여주므로 행복하게 바라볼 수 있었답니다.
그러나 곧 내가 그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만, 번호표를 먼저 받았을 뿐이었습니다.
내 친구였던 그녀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당신의 아이를 가졌다고 했습니다. 당신이 책임지지 않는 아이를 자신도 책임질 생각이 없다 했지요.
그녀는 내게 병원에 같이 가주길 원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당신에 대한 복수를 내게 해대고 있었지요.
이상하죠.
당신의 아이를 지우는 그녀를 병원에 데려다 주며 안도의 한숨을 쉰 것 같습니다. 그녀는 다만 화가 났을 뿐, 당신에 대한 미련은 조금도 내비치지 않았기에…….
당신은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을 알았지만, 내게 변명도 하지 않았고, 그녀에 대한 죄책감도 아이에 대한 책임감도 나타내지 않습니다. 별일 아니므로 변명 따윈 필요 없다는 듯이.
그녀는 내가 모르는 당신의 모습을 내게 무슨 선심이라도 베풀 듯 모두 말해주고 당신이 사는 이 나라를 떠났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여자와 내 곁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내게 '넌 아니다.'라는 말도 해주지 않은 채.
누군가 그러더군요. 마지막 사랑이 유일한 사랑이라고.
내가 당신의 마지막 사랑이 되면 과거의 사랑은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과거의 사랑이 끝나기만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을 견딜 수 있는 것은 결말을 모르는 과정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정말 당신을 사랑한 모양입니다. 이런 억지를 위안으로 삼으며 당신을 기다린 것을 보면.
당신은 자유로웠고 동시에 솔직했습니다.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당신의 잘못조차도 너무 당당해서 잘못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그 솔직함은 예술가의 상징과도 같았고, 무엇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었고 누구에게도 솔직할 수 없었던 나는 사랑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자기와 다르다는 것은 지극히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마련이지요.
참 이상한 일입니다.
사랑의 빌미가 이별의 그것과 같다는 것은.
그러나 어느 순간, 아니 서서히, 당신의 자유로움은 부도덕함으로, 솔직함은 뻔뻔스러움으로 내게 다가왔습니다. 나를 곁에 두고 나의 존재를 잊어버리는 당신은 내겐 아픔이었지요. 나와 같은 사람들이 지닌 최대의 무기인 참을성이 바닥나버리자 결말을 지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내 참을성은 예술가의 연인이 되기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예상대로 당신은 날 잡지 않겠지요. 당신이 자유로운 만큼 내 자유도 존중해주리라 믿습니다. 난 당신을 너무나 잘 알고, 당신은 언제나 내가 아는 당신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았으니까요.
내가 누리게 될 자유는 꽤 쓸쓸할 것 같군요.
이제 사랑을 믿지 않습니다.
목숨을 걸만한 사랑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 목숨을 걸까 봐 사랑을 하기가 두렵습니다.
더욱이 내 목숨을 당신 같은 남자에게 걸까 봐.

한 달 내내 편지를 썼다. 고치고 또 고쳤다. 마지막으로 편지를 읽어본다. 이제 하고 싶은 말은 다했고, 결말로 치닫고 있다.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고 봉했다.
그러나 편지를 그에게 전해줄 수 없다.
실연은 타이밍의 문제다.
그는, 나보다 먼저, 나를 떠났다.
나는 지금 열린 창가에서 그의 마지막 편지를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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