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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데이아 | 빅토르 모테(Victor Mottez, 1809-1897)

2012. 9. 18.

 

 

 

메데이아, Médée


 

빅토르 모테

Victor Mottez, 1809-1897

 

 

 

  

 

 

관련 링크

WikiMedia         http://bit.ly/OVVGeh

Works of Art       http://bit.ly/OVVyLM

Wikipedia           http://bit.ly/OVVFa9

 

 

메데이아는 마법사다.


그해 봄 형철이 엄마는 우리 집으로 이사를 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엄마랑 내가 함께 사는 지하 단칸방을 포함한 이 집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이 맞는 말이다.
엄마가 일 나간 빈집에서 나 홀로 형철이 엄마를 맞았다. 형철이 엄마는 이 동네 아줌마들이 입는 것하곤 전혀 차원이 다른 원피스를 봄바람에 휘날리며 등장했고, 그녀의 엄청난 이삿짐은 부족함을 몰랐던 이 집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커다란 피아노가 들어갔고, 응접세트가 들어갔고, 어마어마한 장롱이 들어갔다.
이삿짐이 부려지자 동네 사람 하나둘 모여 이삿짐 구경을 했다. 새침해 보이는 형철이 엄마는 동네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짐꾼들을 부리고 있었다. 우유가게 아줌마가 우유라도 하나 넣어볼까 해서 짐을 옮겨주려 했지만, 형철이 엄마가 기겁했다.
우유가게 아줌마는 그 무안한 기억을 잊지 못했고 형철이 엄마가 이 동네를 떠나는 그날까지 형철이 엄마에 대한 무수한 소문의 진원지 노릇을 도맡아 했다. 가진 자의 인간적인 결점은 못 가진 자의 결속을 가져오기 마련이어서 소문은 삽시간에 번져갔다.
그렇게 시작부터 삐꺽거리며 자리 잡은 형철이 엄마는 그날도 홀로 왔고 그 다음 날도 그리고 그 다음 날도 홀로 지냈다. 그럼 형철이는 어디 있느냐고? 열흘쯤 지났을까, 한 남자가 한 줌도 되지 않는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찾아왔다. 형철이 엄마의 첫마디가 가관이었다.
"형철아!"
남자의 손아귀를 벗어난 그 한 줌이 형철이 엄마 품으로 뛰어든다. 세상에! 남자는 떠났고 개는 남았다.
난 첫 대면부터 그 개를 좋아하지 않았다. 난 그 개가 메리, 루시, 폴 뭐 이런 개 같은 이름이 아닌(난 커서야 그것들이 서양사람 이름이란 걸 알았다) 형철이라는 사람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부터 기분 나빴다. 더욱이나 먹는 게 우유니 불고기니 하는 나도 쉽게 먹지 못하는 것들을 먹기까지 하니 어찌 아니꼽지 않겠는가?
내가 형철이네를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묘한 적대관계도 시작되었다. 개도 꽤 민감했다. 그 개도 내가 싫은 모양이었다. 나만 곁에 가면 으르렁대곤 했다. 그렇다고 내가 출입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곳에는 많은 것이 있었다.
형철이 엄마는 동네 사람 모두를 무시했지만, 나만은 좋아했다. 그리고 내가 생전 갖지 못할 장난감들을 오로지 나를 위해 형철이네 방 하나를 가득 채웠다. 그 방은 장난감들이 끝도 없이 나오는 마법사의 모자 같았다. 가끔은 형철이도 마법에 걸린 왕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엄마한테는 미안하지만, 형철이엄마가 내 엄마가 되어 마법의 성에서 부족함 없이 사는 꿈을 가끔 꾸곤 했다. 물론 형철이는 내 꿈에서 제외되었다.

 

메데이아는 영웅 이아손이 황금 양털을 찾는 걸 도와준다.


나는 형철이 엄마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했다. 그럴수록 형철이와의 적대관계는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 둘이 우호적인 때는 형철이를 데려온 남자가 방문했을 때였다.
형철이 엄마는 남자가 오면 형철이를 내게 맡기고는 놀다 오라며 돈을 몇 푼 쥐여주곤 했다. 우유와 고기에 길든 귀한 형철이는 내가 맡는 즉시 똥개로 변했다. 내 의지대로 이리저리 끌고 다녔고 형철이는 잰걸음으로 나를 따라다니기 어려워 헉헉대곤 했다. 난 형철이가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최대한 이용했다.
내가 형철이를 데리고 우유가게 앞 평상에 앉아서 줄줄이 사탕이라도 빨고 있으면 호기심과 복수심에 불타는 우유가게 아줌마는 형철이 엄마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곤 했다. 난 별 거리낌 없이 남자의 출입을 얘기하는 대가로 우유 한 병을 들고 돌아오곤 했다. 그 이후 동네에는 형철이엄마가 어느 부잣집 첩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지금 생각해도 우유가게 아줌마의 상상력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초등학교 입학하던 날에 엄마는 일을 나가야 했으므로 참석할 수가 없었다. 난 형철이 엄마에게 엄마 없는 입학식의 서러움에 대해 얘기했고, 형철이 엄마는 엄마 없는 서러운 입학식에 기꺼이 참석했다. 난 아이들에게 우리 엄마라고 자랑했고 아이들은 모두 부러워했다.
내가 학교에서 첫 말썽이란 걸 피웠을 때도 형철이엄마가 무마해주었다. 그건 고의는 아니었지만, 돈이 드는 말썽이었다. 내 훌륭한 발놀림이 종종 골대가 아니라 교무실 창문을 향하곤 하는 것이 문제였다. 도저히 엄마에게는 말할 수 없었고 학교에서 엄마라고 알고 있는 형철이 엄마는 두말 하지 않고 그 대역을 해주었다. 물론 돈까지 기꺼이 내놓고 말이다.
형철이 엄마의 대역은 조만간 끝이 났다. 학교에서 엄마에게 전화했고 엄마는 영문을 몰라 하던 중 내막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용감하게도 집주인인 형철이 엄마를 찾아가 내 아들에게 엄마행세 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렀다. 마을 사람 모두를 무시했던 형철이 엄마는 엄마에게는 고분고분했다.
형철이 엄마는 엄마에게 자신의 얘길 했다. 가끔 찾아오는 남자는 전남편이란다. 남편과 함께 갖은 고생 끝에 이제 좀 살 만하다 했더니, 시어머니의 손자 욕심 때문에 이혼했단다. 아이를 낳지 못한 형철이 엄마는 형철이를 아들 삼아 가끔 찾아오는 남편을 바라보며 하루하루 산다는 것이다.
엄마는 형철이엄마의 사정은 딱하다 했지만, 내게는 주인집 출입을 금지했다. 그래도 의리를 저버릴 수는 없어 남자가 오는 날이면 형철이를 데리고 마을나들이를 하곤 했다.
그럼 또다시 우유가게 아줌마에게 그동안의 이야기를 해주고 우유를 얻어먹으며 형철이와 하루를 보내곤 했다.
그날 이후 형철이 엄마는 소박맞은 여인네라고 소문이 돌았다. 후에 안 일이지만, 이건 상상이 아니라 가장 적절한 표현이었다.

 

이아손은 크레온 왕의 딸 때문에 메데이아를 배신하다.

 

남자가 올 때면 형철이 엄마는 정말 행복해했다. 그 애지중지하던 형철이마저 떼어놓을 정도면 그 행복은 가히 짐작할 만했다. 내가 출입금지 때문에 그 집에서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어지자 난 형철이에게 후해졌다. 가끔은 내가 형철이를 안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형철이에게 애정을 표현할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남자의 발걸음이 점점 뜸해지자 형철이 엄마는 형철이에게 몰두하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두세 번씩 목욕을 시키고 털을 빗겨주기도 하고 리본을 묶었다가 풀고 형철이를 가지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대곤 했다. 그러면서도 형철이엄마도 형철이도 행복해 보이질 않았다.
날이 따뜻해지자 형철이는 자꾸 밖으로 나가려고 꽉 닫힌 문을 발톱으로 긁어대곤 했다. 형철이 엄마는 그럴수록 문을 꼭꼭 닫았다. 집 앞 도로에는 아파트 개발현장에 쓰일 자재를 나르는 화물차들이 씽씽 지나다녔기 때문에 그녀의 행동은 정당화될 수 있었지만, 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형철이를 가둬두는 것은 왠지 잔인하게 느껴졌다.
한번은 너무 안쓰러워 문을 열어주려 하자 형철이엄마가 나를 밀어냈다. 나와 마주친 그녀의 눈빛은 뭔가에 잔뜩 화가 난 듯했고, 뭔가를 간절하게 원하는 듯했다. 너무 무서웠고 이상하게도 너무 슬펐다.
그 남자가 한참 뜸을 들이다가 드디어 나타났다. 형철이와 난 여느 때와 같이 마을나들이를 나갔다.
다음 이야기는 우유가게 아줌마에게서 들은 얘기다.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남자는 다른 여자와 결혼했고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전하러 왔다. 기다리지 말고 각자의 삶을 살자고 했다 한다. 그 우아한 형철이 엄마는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소리 질렀단다. 욕설과 원망과 한탄을 담은. 그래서 우유가게 아줌마는 굳이 내게서 들을 필요 없이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단다.
형철이를 데려다 주러 가니 헝클어진 형철이 엄마가 넋 나간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형철이도 그녀 곁에 가기를 두려워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난 형철이를 내려놓고 그 으스스한 집을 빠져나왔다.

 

메데이아, 자신의 두 아들을 죽여 남편 이아손에게 복수한다.


그날은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날 중의 하나다.
남자가 떠난 다음 날, 난 왠지 모를 두려움으로 형철이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형철이는 두려운 듯 문을 긁어대고 있었다. 그건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었지만, 그날은 여느 날과 달랐다.
 '그만 해. 제발 그만, 그만 해!'
맘속으로 소리쳤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내 입이 아니라 형철이네서 들려왔다.
"너도 가고 싶어! 그래? 정말 그래!"
형철이 엄마는 빗자루를 들고 형철이를 후려서 쫓아냈다. 형철이는 매에 몰려 뛰쳐나갔고 형철이 엄마는 그 뒤를 매섭게 쫓았다.
"그래, 가버려, 이 몹쓸 놈아!"
형철이가 대문을 벗어나자마자 소름 끼치는 굉음이 들렸고, 대문 밖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형철이 엄마는 빗자루를 내려놓고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형철이엄마가 사라진 한참 뒤에야 대문을 열고 사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형철이는 도로에 그의 흔적을 남겼지만 그를 그렇게 만든 물체는 어디에도 없었다. 사람 이름을 가진 형철이지만 이 순간만은 철저히 개였다. 형철이 엄마가 내던진 비를 들고 형철이의 흔적을 치웠다. 그건 욕지기가 나는 일이었지만 내가 아니면 아무도 할 사람이 없었고, 형철이를 그 상태로 버려두는 것은 더 욕지기가 치미는 일이었다. 그건 이제 막 애정으로 바뀐 내 적에 대한 최후의 예우였다.
형철이 엄마는 마을을 떠났다. 내게 장난감을 잔뜩 남겨주고 떠났지만,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에는 이미 너무 커버렸다.

 

메데이아, 아테네 아이게우스왕의 아내가 되다.


그리스신화를 뒤적이다가 메데이아를 만났다. 그리고 형철이엄마를 생각해냈다. 내 어린 시절의 잠깐이었지만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그녀는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신화 속의 메데이아는 아테네 아이게우스 왕의 아내가 되었다는데, 그녀는 다시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러하기에, 난 그녀가 진짜 메데이아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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