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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풍경

교수대의 비망록 | 율리우스 푸치크

2021. 5. 14.

어느 날 보안서원들이 집으로 들이닥쳐 그를 체포했다.

전등 불빛으로 환한 대기실에서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하루에도 몇 번이고 확인하던 그때, 율리우스 푸치크의 글이 그를 위로했다. 푸치크는 감옥에서 처형을 기다리면서도 글을 썼다.

[…] 기행은 그 단호함을 흉내조차 낼 수 없었지만, 세상에 그런 이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큰 용기와 위안을 얻었다.

일곱 해의 마지막 | 김연수

 

김연수는 <일곱 해의 마지막>에서 체코의 공산주의자 율리우스 푸치크 <교수대 앞에서의 말>을 언급한다.

그래서 찾아본 책이 <교수대의 비망록>이다.

 

체코의 언론인이며 작가, 문예평론가 그리고 공산주의자인 율리우스 푸치크는 게슈타포에 체포된 후 처형되기 전까지, 한 간수의 도움으로 담배종이 등에 글을 남겼다.

푸치크는 형장에서 사라졌지만, 그의 글은 살아남았다.

 

1942년 4월 24일의 아름다운, 춥지도 덥지도 않은 봄날 밤.

푸치크는 체포되어 페체크 궁으로 끌려갔다.

 

은행가 페체크의 의뢰로 신고전 양식으로 지어져 은행으로 이용되었던 페체크 궁은 독일 점령 후 게슈타포 본부가 되어 나치에 저항하는 체코인을 취조하고 고문하는 장소가 되었다.

 

267 감방

 

문에서 창까지 일곱 걸음, 창에서 문까지 일곱 걸음.

 

아아, 끊임없는 죽음의 공포라는 향료로 맛을 돋운 한 숟갈의 맛있는 굴라시.

 

누가 데리러 올까? SS 제복을 입은 간수인가, 그렇지 않으면 제복을 입지 않은 죽음인가?

 

267호 감방은 취조를 마친 죄수들을 수감하는 공간이다.

일곱 걸음의 물리적 공간.

고문과 취조로 만신창이가 된 죄수가 잠시 쉴 수 있는 공간,

죽음의 공포라는 향료가 굴라시의 맛을 돋우는 공간. 마지막 굴라시가 될 수도 있으니.

그리고 삶을 포기할 것인가, 죽음을 극복할 것인가 끊임없이 갈등하는 공간.

SS 제복이 오면 다시 공포의 취조시간이 시작되는 것이고, 제복을 입지 않는 죽음은 말 그대로 끝이다.

 

267감방은 노래한다. 나는 평생 노래해왔다. 가장 치열한 삶의 방식을 취하고 있는 마지막에 이르러 노래를 중단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럼에도 그는 고통과 공포의 삶을 견디고, 죽음을 기다리면서 감방에서 노래한다.

최근에 유관순 열사와 감옥 동기가 수감된 8호 감방에서 불렀다는 옥중 창가 가사에 곡을 붙인 안예은의 <8호 감방의 노래>를 들었다.

 

8호 감방의 노래 | 안예은

 

삶의 마지막에서도 노래할 수 있는 신념이란 어떤 것일까?

아무래도 푸치크나 8호 감방의 그녀들보다는 <일곱 해의 마지막>의 "기행"에 더 감정이입 된다.

이 평범함이 어찌 그 단호함을 흉내낼 수 있겠는가?

 

400호실

 

400호실은 고문실로 가기 위한 대기실이다.

덩그러니 넓은 방에는 긴 의자 여섯 개가 앞뒤로 늘어서 있고, 취조를 받는 사람들은 굳은 자세로 고문실에서 들려오는 비명이나 울부짖음을 들으며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차렷!’ 자세로 앉아 있다.

 

언제 누구의 입에서 처음 나왔는지 지금으로선 확인할 길이 없지만 페체크 궁 옥내 구금실은 ‘영화관’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

나는 여기서 내 생애에 대한 영화를 백 번도 더 보았다. 자세한 순간들은 천 번도 더 보았다. 지금 그것을 새삼스레 글로 옮기려 한다. 만약 글이 다 끝나기 전에 교수대의 밧줄이 내 목을 죈다 해도 뒤에 남은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이 그 ‘해피엔드’를 묘사해주리라 믿는다.

 

대체 누가 사상에 차렷 자세로 있으라고 강요할 수 있는가.

 

신념은 언제나 희망과 함께 한다.

자신이 사라지더라도 뒤에 오는 사람들이 이어주리라는 믿음.

사라지는 것은 자신이지만, 신념은 살아남을 것이라는 희망.

그래서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죽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나와 미레크 이외에 대체 누가 이 일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나와 미레크 이외에 대체 누가 이 일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이런 의문들에 대한 대답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대답은 무겁고 가혹했다 - 미레크가 기대를 저버린 것이다.

 

고문을 당하는 이의 심리를 묘사한 글을 본 적이 있다.

처음에는 부인하고, 다음에는 사실을 진술하고, 마지막에는 고문관이 원하는 것 같은 묻지도 않는 말을 하게 된다고. 

미레크는 푸치크와 함께 연행된 동지다.

푸치크가 말하지 않은 동지들이 연행되는 것을 보며 갖는 의문.

나와 미레크 이외에 대체 누가 이 일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끔찍한 고문 때문이라고 해도,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까지 털어놓은 미레크.

그 현실은 무겁고 가혹하다.

 

비겁한 자는 자신의 생명 이상의 것을 잃는다. 그는 영광에 넘친 군대에서 탈주한 끝에 적 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적에게조차 경멸당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살아 있다 해도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다.

 

아이러니하다.

기대를 저버린 미레크가 기대에 부응한 적에게조차 경멸당한다는 것은.

 

부디 늘 깨어 있기를!

 

종막이 오른다.

사람들이여, 나는 그대들을 사랑했다.

부디 늘 깨어 있기를!

1943년 6월 9일

율리우스 푸치크

 

1943년 6월 9일 마지막 글을 남기고 페체크 궁에서 독일로 이송된다.

1943년 9월 8일 처형된다.

그는 형장에서 사라졌지만, 그의 글은 지금도 어디에선가 누군가를 깨우고 있다.

 

P.S. 이 글을 쓰고 나서 영화 “7월 22일”을 봤다.
2011년 7월 22일 노르웨이 극우주의자가 우퇴위아 섬에서 캠프를 하던 아이들을 저격 테러를 한다.
이 영화에서 테러범이 하는 말.
“내가 실패해도 내 뒤에 오는 이들이 이어갈 것이다.”
신념은 양면을 갖는다.
신념은 한편으론 위대하고, 한편으론 공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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